최종편집 : 2026-04-17 오후 06:02:50

종합행정정치출향인사회/복지/여성산업문경대학·교육문화/체육/관광사람들길 따라 맛 따라다문화

전체기사

커뮤니티

공지사항

독자투고

직거래장터

자유게시판

결혼

부음

뉴스 > 사설/칼럼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뉴스로 세상 읽기(97)-일본의 사과(謝過)는 일본의 수준(水準)이다(1)

2023년 03월 31일(금) 16:55 [주간문경]

 

 

↑↑ 강성주
전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주)문경사랑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좌파(左派) 민주당의 반일(反日)선동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겹친다. 민주당 일각의 이런 반일 선동에 대해, “맞다”고 동의하는 국민들이 있는가 하면, 과거사에 대해 논쟁하기보다는 “이제는 미래를 생각하자”는 국민들도 있다. 이번에도 “과거에 발목 잡히면, 미래를 잃는다”는 말이 나왔다. 이럴 때 역사를 살펴보면 길이 보인다.

식민지배와 전쟁

한-일 관계의 큰 변곡점이 되었던 한-일국교정상화 회담(1951~1965)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자.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국교 정상화 회담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중공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UN)군이 돕지 않았다면 우리는 공산화된 한반도를 떠나 타이완[臺灣]처럼 제주도로 철수하든지, 일본에 망명정부를 꾸려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를 권유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 논산에 제2훈련소가 들어서고, 포항에 K-1 비행장, 대구에 K-2 비행장이 생긴 이유가 당시의 급박함을 보여준다.

3년 만에 겨우 전쟁이 끝났으나, 국가재건과 경제발전에 필요한 돈은 미국의 원조(援助)로 메꿔나갔다. 원조를 전제로 해서 나라의 예산을 짰으니, 사실 나라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산하가 폐허가 됐지만,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의 가혹했던 아픔은 더 깊숙이 남아 있었다. 사과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일본측 회담 대표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많은 공장과 재산들을 남겨 두었는데, 이것은 어떻게 할거냐?’(구보다 망언, 1953) 등등으로 골을 지르고 있었으니, 회담 진척이 어려웠다.

고뇌하는 박정희 대통령

제1, 제2 공화국 등 민간정부의 난맥상에 불만을 품은 젊은 군인들이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들이 한-일회담을 맡았다. 회담이 진척되면서 내용이 알려지자, 대학생과 야당은 ‘굴욕적인’ 회담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일본이 사과도 하지 않는데, 무슨, 푼돈을 받고 국교를 정상화하냐?” 충분히 반대할만 했다.

지도자의 고뇌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반대하는 국교정상화를 그만 두느냐(과거), 반대를 무릅쓰고 마무리하느냐(미래),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만두면 국민 여론에 잘 따른 것으로 포장할 수 있으니까, 많은 국가 지도자들은 현실(국민여론)을 따른다. 미래란 기본적으로 누구나 모르는 일이지만, 오지 않은 미래의 꿈과 가능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는 드물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가 생각난다.

그 당시 미국은 이런 정보보고서를 냈다. “학생과 야당은 반대 성명을 내고 시위를 하고 있으나, 시민들의 호응이 거의 없다. 4․19 때와는 그 반응이 다르다. 밀고 나가도 되겠다.” 광화문 일대가 시위 군중 때문에 길이 막히자 미국 대사는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하야냐, 계엄령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박 대통령을 면담한다. 박 대통령은 결단했다. 계엄령을 발동해 반대를 억누르고 국교정상화를 택했다. 도쿄에서 국교정상화 협정이 조인되고 그 다음 날(1965.6.23) 대통령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박 대통령은 ‘매국적인 협정이라는 국민들의 비판도 듣고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 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는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푼돈이 아니었다

1965년 우리나라는 청구권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배상받았다. 무상 3억 달러는 당시 환율로 804억원이었다(2023년 기준, 3조3,800억원, 한국은행). 1965년 우리나라 예산이 848억원이었다. 무상 3억달러는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95%에 달했다. (2023년 예산이라면 600조원) 유상 2억 달러까지 합치면 우리 예산의 160%가 된다.

또 당시 체결된 협정은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한다’고 돼 있었다. 그리고 65년 당시는 소위 전쟁위안부 피해자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다. 당사자들이 아직 젊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후 한국정부는 박정희(1977), 노무현(2007) 두 대통령 집권 시절, 국민들로부터 신고를 받아서 개인별로 보상금을 나눠주었다.

지난 2019년 문재인 정부가 한일협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때, 일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후 총리 역임)은 “당시 한국의 한 해 국가 예산의 1.6배에 해당하는 유무상 자금을 제공했다. 교섭과정에서 재산, 청구권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으로 됐다”(2019.9.12.)고 설명했다. 일본측의 설명이 맞다. 그리고 국가 간의 협정(協定)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바로 피해자에게 나눠주지 않고, 포항종합제철소, 경부고속도로, 댐, 항만 건설 등에 투입했다. 우리나라는 참여를 못했지만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여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1951.9 조인)에 참여했던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4개국은 일본으로부터 ‘전쟁 피해 배상금’으로 2억~5억 달러를 각각 받았다. 이들은 국민 개인에게 나눠주거나 리조트 건설 등에 자금을 쓰는 바람에 국가 경제 도약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박 대통령은 받기 전에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부터 만들었다. 10년 뒤 1976년, 대통령은 <청구권자금백서>를 발간해 국민들에게 공개했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지도자의 애국심과 용기, 선견지명, 발전 전략이 한국과 다른 신생국과의 운명을 갈랐다. (다음호에 계속)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주간문경을 읽으면 문경이 보인다.”
- Copyrights ⓒ주간문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문경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주간문경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더 새롭게 아름답게 찾아온 ‘2

문경시 베트남 까마우성 계절근로

문경시 점촌점빵길 빵 축제 특별

문경시장애인주간이용시설 장애인

영순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정기회

점촌 원도심에서 제2회 점촌점빵

문경시보건소 찾아가는 감염병 예

문경교육지원청 중등 신규 및 저

문경시보건소 심뇌혈관질환 예방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문경사무소

창간사 - 연혁 - 조직도 - 광고문의 - 제휴문의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구독신청 - 원격

 상호: 주간문경 / 사업자등록번호: 511-81-13552 /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2길 38(점촌동) / 대표이사: 남정현 / 발행인 : 남정현/ 편집인: 남정현 / 청소년보호책임자 : 남정현
제호: 인터넷주간문경 / 등록번호: 경북 아00151 / 종별: 인터넷신문 / 등록일 2010.10.28 / mail: imgnews@naver.com / Tel: 054-556-7700 / Fax : 054-556-9500
Copyright ⓒ (주)문경사랑.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