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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89):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40): ‘장면 정부 이후의 독도’

2019년 07월 09일(화) 17:18 [주간문경]

 

 

↑↑ 강성주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주)문경사랑

 

지난번 변영태 장관의 특별성명을 살펴봤지만, 이승만 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 교섭(1952~1965) 초기 4 차례의 본 회담을 가졌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일본을 극도로 싫어한 데다, 3년에 걸친 6.25전쟁 수행 등으로 회담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가 우리 수역에 포함되는 평화선을 선포해(1952.1.18.), 독도에 대해서 일본이 말도 끄집어 내지 못하도록 했다.

이어 1960년 <4.19혁명>으로 집권한 장면(張勉) 정부(제2공화국)는 일본과의 교섭에 적극적이었다. 제5차 한일회담 수석대표였던 유진오 박사는 “경제건설을 위해서도 일본의 자본이나 기술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장면 박사의 민주당 정부가 한일 회담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회상했다. 실제 당시 장면 정부는 <국군 10만명 감축안> 과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 청구권 자금> 등 두 갈래로 경제 개발 자금 확보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대일 청구권으로 장면 정부는 10억 달러를 제시했고, 일본은 6억 달러를 제시해, 그 절충점인 8억 달러 선에서 의견이 접근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1964, 국회보).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1960.9.13.) “일본은 대공 방위상 평화선을 인정하고, 한-국은 잠정적인 어로협정 체결에 동의했다“라는 것이다. 이때만 해도 일본은 독도를 ‘고기잡이 측면에서 중요한 것’으로 접근하는 측면이 강했다. 장면 정부 시절에는 독도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순풍을 타던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은 1961년 10월 경 체결이 예상됐으나, 5월에 쿠데타가 나면서 또 한 번 흔들리게 된다. 사실 장면 정부는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아서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일본은 크게 놀랐다. 관련 기록을 보면 처음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물론 일본도 누가 주동자인지, 또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엄청 궁금해 했던 것으로 나온다. 다행히 곧 박정희 장군이 전면에 나서면서 정체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한일 회담은 다시 시작된다. 1961년 10월 20일, 제 6차 본회담이 도쿄에서 재개됐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일회담은 청구권 자금의 액수 문제에 이어 61년 말 일본 측이 제기한 독도 영유권 문제 때문에 진전이 쉽지 않았다.

일본은 한일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독도는 일본 영토이므로 한국 정부가 그 섬에 설치한 등대, 건물, 국기게양대, 무선시설 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일 대표부(당시는 국교 수립 전이어서 대사관이 아니라 대표부가 있었다)에 구술서(Note Verbale, 외교 공한의 한 형태로 질의, 의뢰, 통고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를 보내 왔다.

돈도 돈이지만, 영토 문제는 또 다른 문제였다.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러는 사이 1963년 10월 대선이 끝났다. 5.16 이후 군사정부를 이끌던 박정희 장군이 전역한 뒤 출마해, 윤보선 후보를 가까스로 이기고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동안 참고 있던 미국이 강하게 압박한다.

64년 1월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이 서울을 방문해, 한일 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촉구한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1964년의 <6.3 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격렬한 반 정부데모 때문에 한.일 국교정상화를 하지 않는다면, 조국 근대화는 물 건너 간다”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교정상화를 우선하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나라에는 돈이 너무 없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1960년대 한국이 경제개발을 시작할 당시 국민소득은 아주 낮았다.

세계은행의 1965년 통계를 보면, 1위 쿠웨이트 4,331$, 2위 미국 3,665$, 좀 내려가면 일본 889$로 30위, 필리핀 189$로 81위, 한국은 106$로 105위였다. 당시 지도자는 엄청나게 고민했을 것이다.

야당은 물론 대학생, 고등학생, 기독교 등 종교계, 군 원로 등 많은 반대가 있었다. “제 2의 이완용”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협상전략으로 독도문제를 들고 나왔다. 당초 일본은 한일협정이 일본 국회에서 비준을 받기 위해서는 야당인 사회당의 협조가 중요했다. 당시 사회당 등 일본 내 혁신 세력은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

한일간 국교가 정상화되면, 한.미.일 삼국간 군사동맹이 강화되고, 이것은 곧 공산권에 대한 봉쇄가 강화되는 것이라는 게 반대 이유였다. 국교정상화에 대한 야당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일본은 ‘독도’를 협정에 담거나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명기(明記)하기를 원했다.

이 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은 몇 차례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두 나라는 <한.일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이라는 별도의 협약을 체결했다.

두 나라는 “달리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기로 하며,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調停)에 의해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로 정리했다.

독도에 관한 조항인데, 독도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고, 분쟁에 관해서는 일본은 ’독도가 이 분쟁에 포함 된다’고 해석하고 한국은 ‘독도는 본래 한국의 영토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분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진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공식적인 외교채널 말고, 한일 양국의 비공식 채널이 가동돼 독도문제를 다뤘다는 기록이 있다. 소위 말하는 한.일 간의 <독도 밀약>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하게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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