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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 세상읽기(21)-“하늘에서 함께 공을 찰 것이다”-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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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08일(화) 16:19 [(주)문경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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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강성주
전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 (주)문경사랑 | | “분명히 언젠가 하늘에서 우리가 함께 공을 찰 것이다” ‘축구의 신(神)’이라는 마라도나(Maradona) 선수가 지난 11월 25일 세상을 떠나자 ‘축구의 황제(皇帝)’ 펠레(Péle)가 그를 애도한 이 말이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긴다.
축구의 황제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20살이나 어린 축구의 신에게 전하는 헌사요 애도사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참으로 절절하고도 진심 어린 이별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깊이 아끼고 존중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이런 추념의 변(辯)이 나오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해서 더욱 애절한 추도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젊은이들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1985년생)’나 ‘리오넬 메시(1987년생)’ 같은 선수들에게 열광하지만, 지금 80살인 펠레(1940년생)나 이번에 60살로 일찍 세상을 떠난 디에고 마라도나(1960년생)는 그 전 세대 축구팬들에게는 황제요 신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이나 유럽의 프로 축구 경기를 실시간으로도 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방송이 요즘 같지 않아서 ‘황제’나 ‘신’들의 신명나는 골 잔치를 뉴스에서 짧게 잠간 보거나 한참 뒤에 녹화된 경기를 볼 수 있어, 정말 신이나 황제를 알현(謁見)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1960년 아르헨티나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마라도나는 어릴 때부터 축구공과 함께 했다. 8살 때부터 공을 잘 갖고 논다는 소문이 자자해 11살 때부터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 팀(로스 세볼리타스)에서 선수로 뛰고, 1부 리그 시합의 하프타임에 공 묘기를 보여주기에 이른다.
어린 마라도나의 재능을 알아본 팀은 마라도나에게 아파트를 사주고, 판잣집에서 옮겨온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자, 마라도나는 ‘축구로 성공해 가족들과 함께 부유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77~1994 국가대표 선수
16살인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뛰면서 167경기 출전에 115골을 기록한다. 1978년부터 득점왕, 최우수 선수, 올 해의 선수상 등을 휩쓴다. 그러나 1978년 마라도나는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첫 우승을 차지한다.
1979년, 드디어 때가 왔다.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월드컵(FIFA U-20)에서 마라도나는 165cm라는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뛰어난 스피드와 균형감으로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고, 본인도 최우수선수상을 받는다. 19살, 축구의 신동(神童)이 탄생했다. 22살 때인 1982년 마라도나는 세계적인 명문구단 ‘FC 바르셀로나’로 스카우트된다. 거기서 2년, 이어 1984년부터 91년까지 8년간 ‘SSC 나폴리’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그 사이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하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다.
1986년의 멕시코월드컵은 흔히 “마라도나의, 마라도나에 의한, 마라도나를 위한 월드컵”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라도나는 브라질의 지쿠, 프랑스의 미셀 플라티니와 함께 주목 받는 3인방이었다. 멕시코 월드컵은 우리나라 하고도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함께 A조에 편성됐다.
첫 경기에서 한국은 허정무 선수의 태권도 축구, 조민국의 끌어안기 등 있는 힘을 다 쏟아 방어했지만 3:1로 아르헨티나에 패배한다. 마라도나는 8강전에서 만난 잉글란드와의 시합에서 이마가 아닌 손으로 공을 쳐 골인시킨다. 그러나 심판은 이를 보지 못했고, 골로 인정됐다. 이 경기에서 이기고 난 마라도나는 “신의 손(Hand of God)에 의해 약간, 나머지는 나의 머리로 인해 득점했다”라고 핸들링 반칙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78년 이어 86년 월드컵 우승
1986년 월드컵의 우승은 마라도나가 활약한 아르헨티나에게 돌아갔다. 마라도나에겐 최고의 해였다. 그 때 겨우 26살이었다. 그 뒤 1990년 이탈이아 월드컵에서 준우승,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그 해 마라도나는 경기 도중 금지약물인 에페드린 양성 반응이 나와, 두 경기 만에 미국을 떠난다. 마라도나는 그 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감독도 맡았으나, 선수시절의 명성에는 훨씬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다. 선수가 아닌 시민으로서 마라도나는 약물복용, 폭행 시비, 숨겨진 자녀 등이 드러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1월 25일 마라도나가 숨을 거두자, 아르헨티나는 그의 시신을 대통령궁(Casa Rosada)에 안치하고, 조기를 게양하고 국장(國葬)으로 마지막 길을 준비했다. 아르헨티나 축구팬들은 국기(國旗)와 등번호 10번의 유니폼으로 덮인 고인의 관을 향해 작별인사를 건냈다. 추모행렬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이미 3km에 달했다.
전성기 때 선수생활을 한 이탈리아의 나폴리도 홈 경기장의 이름을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경기장으로 바꾸고, 관내 학교도 3일간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마라도나를 애도했다. 그 가운데서도 펠레의 마지막 인사는 정말 아름다운 말로 기억된다. 두 사람이 꼭 하늘나라에서 만나 재미있게 공을 차게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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