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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75):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26): “소위 ‘문명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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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19일(화) 16:45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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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강성주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 (주)문경사랑 | | 오늘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될 그 무렵, 세계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우리는 개항이 늦고 또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욕심에서 우리나라를 병탄한 것도 모자라 만주에 가짜 나라 만주국(1932~1945)을 세우고 또 중국과 전쟁하고 미국에 기습 공격을 가한 뒤 전쟁을 계속하다가 패망했다고 배웠다.
일본의 이러한 부국강병과 패망의 길은 일본의 욕망도 욕망이지만,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였다.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였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면, 유럽인들은 향료무역 등 경제적인 이익 추구와 기독교의 전파 그리고 ‘문명화’라는 이름을 걸고 동방으로 진출했다.
유럽 국가들의 동방 무역은 <동인도회사>라는 독점 구조로 진행됐는데, 이 <동인도회사>가 영국에서는 1600년, 네덜란드는 1602년, 덴마크에서는 1616년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664년에 설립됐다.
동남아, 극동 등을 다니며 무역에 종사하던 유럽인들은 경제적인 이익 추구와 함께 기독교의 전파에도 열심이었다. 초기 기독교 전파에는 로마교황청의 적극적인 선교정책과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실의 선교에 대한 열정 등이 어우러져 추진됐다. 동티모르, 필리핀, 베트남 등의 기독교 인구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방무역에 참여하는 유럽 국가들로부터 과학기술과 정보 등을 습득하고 또 기독교의 전파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일본은 마지막으로 유럽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는다.
유럽인들은 대항해가 시작될 무렵인 16세기부터 유럽이 팽창해 미개한 비(非)서구 나라들을 지배하고 그 민족들을 구제하고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중했다.
예컨대 대항해 시대 초기의 선두주자 스페인의 신학자 겸 국제법 학자인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는 1538년 살라망카(Salamanca)대학에서의 강연에서 “세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의 진출이나 무역에 저항하는 인디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은 정당하며, 또 인디언들은 인간의 위엄과 문명에 어울리는 국가를 건설하고 운영할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에서부터 1890년 미국 사우스다코다주(州)의 운디드니(Wounded Knee)전투에 이르기까지 400년간, 남북아메리카에서는 약 1억명의 원주민[先主民]들이 유럽인과 그 후손들로부터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된다(美 하와이대,David Stannard, American Holocaust:Columbus and the Conquest of the New World, 1992).
유럽인들이 추구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인류의 보편적인 진보와 연결시킨 이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19세기 중반에 와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으로 꽃을 피운다.
이 사회진화론은 1859년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에 입각해 발전한 사상으로 “사회는 가면 갈수록 발전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회진화론은 생물의 적자생존처럼, 사회에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일부 학자들은 비유럽 사회를 국제법적인 견지에서 국가로 간주하기를 꺼려했고, 심지어는 유럽인이 살지 않은 곳은 무주지(無主地, terra nullius)라고 보기까지 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 계속되는 영토분쟁 또는 전쟁이, 유럽인들의 이러한 사고의 후유증임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러한 유럽인들의 사고가 바로 “비서구 원주민들을 개화시켜 근대화된 사회로 인도해야 한다”는 ‘문명화 이론’ ‘문명화 사명’이다. 문명의 반대편에는 야만이 있다.
즉, 문명은 야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당시 유럽의 문명화된 12개국과 미국, 오스만터키 등 14개국은 1884년 11월 베를린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아프리카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서아프리카 회담(West Africa Conference)’ 혹은 ‘콩고 회담(Congo Conference)’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 분할회담이다. 이 때문에 1,0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학살됐다. 문명인인 유럽인들이 마음대로 그어놓은 국경선 때문에 이들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싸우고 있다.
이러한 문명화론이 아시아로 오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문명’에 근접한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문명화로 이끌어야 된다는 논리로 둔갑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 일본 식민주의의 싹이 여기에서 나온다. 따라서 일본의 인접국 침략은 유럽 문명화 이론의 아시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유신 다음 해인 1869년 <에조치, 蝦夷地>라 부르던 북방 섬을 병합하고 <홋카이도>라고 이름을 바꿨다. 1875년 일본과 러시아는 협정을 맺고, 일본이 <쿠릴열도> 전체를 차지하는 대신 러시아는 <사할린섬> 전체를 갖도록 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사할린 섬을 양분해, 50도선 남쪽의 사할린[南사할린]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주민인 아이누(Ainu)는 삶의 터전도 잃고 고유 언어도 잃게 된다.
1876년 3월 일본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천 km나 떨어진 보닌제도(Bonin, 오가사와라 제도)를 영토로 편입하고 1879년 일본 군대와 경찰이 류큐왕국에 파견돼, 류큐왕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된다.
1895년 타이완, 팽호열도를 식민지로 삼고, 1914년 독일의 신탁지였던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를 식민지로 삼는다. 그리고 1905년 독도를 빼앗고, 1910년 한국을 병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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