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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수입 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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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02일(월) 10:23 [(주)문경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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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김 안 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원장 | ⓒ (주)문경사랑 | | 사람은 수입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수입은 돈, 즉 화폐를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물품 등의 재화를 수단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수입에는 일정하게 들어오는 정규 수입이 정상적이지만 때로는 불규칙하게 들어오는 수시적 수입도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가진 다음에 수입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람에 따라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수입 가운데는 노력의 대가로 받는 근로 수입과 자산의 활용으로 들어오는 자산 수입이 있다.
수입이란 측면에서 볼 때, 나는 상당히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수입의 원천이나 다양성 및 시기에 있어 그러하다. 보통사람과 다른 특수한 나의 경우를 비교적 소상히 소개코자 하오니,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기 바란다. 물론 부모님의 생활비나 학비와 친인척의 보조금은 제외된 수입들이다.
최초의 부수입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됐다. 손재주가 있던 나는 동리 여러 집들의 고장 난 우산․소반․책상․의자․장농 등을 고쳐주고 농산물과 과일 등을 대가로 받았다. 그래서 장차 큰 목수가 될 것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6학년에 와서 진학을 하지 말고 장사를 배우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시장 한복판 길에서 양잿물과 라이타돌을 목판에 놓고 팔았다. 친구들 보기가 좀 부끄러웠으나 그런대로 수입이 좋아 방과후와 주말에는 열심히 팔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앞으로 큰 장사꾼이 되리라 칭찬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태극기와 화투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태극기는 아무도 사주지 않아 공짜로 돌려주어 국경일에 달도록 하였고, 화투는 여러 노름꾼들이 조잡하지만 싼맛으로 자주 사주었다. 그래서 장차 환쟁이나 화가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학년 때 우리 마을에 소경인 점쟁이가 이사 왔는데, 자기는 장님이라 글을 읽고 쓸 수 없으니 조수가 되어 달라고 하기에 수락하고 조수로 취임했다. 처음에는 《토정비결》등을 읽고 써주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나 자신이 점을 봐주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장차 점쟁이나 무당이 될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고등학교 학생이 되면서 이들 잡된 직업을 다 털어버렸고 2학년부터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장장 8년간의 가정교사 또는 그룹지도 선생이 되었었다.
대학교 3학년말에는 중학교 강사를 잠시 했고, 대학 졸업 후 1년간은 출판사 편집사원과 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중학교부터 미국 유학을 마칠 때까지 여러 가지 장학금을 많이 받았다.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면서부터는 안정되고 일정한 수입을 받게 되었으며, 아울러 밖에서 원고료와 발표․사회․토론비, 원장․고문․위원 수당, 결혼주례 사례비 등의 잡비도 많이 들어왔다. 교수 정년 후에는 연금과 약간의 자산수입, 특강료 및 원고료, 회의 및 자문 수당 등의 수입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70년간에 걸친 모든 수입의 총액은 불변가격으로 150억원에 이르렀으니 교수직으로는 많이 번 셈이다. 그동안 쓴 돈이 모두 120억원이 되어 현재의 나의 자산은 30억원에 불과하다. 나의 오랜 경험으로 보아 불안정한 고액의 수입보다는 적더라도 안정되고 지속적인 수입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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