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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86):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37): ‘이승만 라인(평화선)’

2019년 06월 11일 [주간문경]

 

 

↑↑ 강성주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주)문경사랑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서명(1951.9)을 마치고, 발효를 기다리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한다.

우리에게는 ‘평화선(Peace Line)’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진 해양주권선언이지만, 미국과 일본 대만 등에서는 ‘이승만 라인(Syngman Rhee Line)’이라고 불렸다.

해방 후 한-일 간의 어업 경계선 역할을 해왔던 맥아더 라인(MacArthur Line)은 <평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폐기될 예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발효 100일을 남겨놓고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독도와 일본의 오키섬 사이에 선을 그었다.

연합국이 일본 어선의 조업 구역으로 그은 맥아더 라인이 평화조약의 발효로 무효화되는데, 그것을 두고만 볼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 <평화조약>의 발효를 손꼽아 기다리던 일본은 깜짝 놀란다.

당시는 ‘영해 3해리’ 시대인데(지금과 같은 ‘영해 12해리’가 인정되는 것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협정 이후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안가에서 50 내지 100해리(평균적으로 60해리)에 선을 그었다.

“해안 어족을 보호하고 생물자원을 육성하며 특히 앞선 기술의 일본의 어업 활동으로부터 영세한 한국 어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독도가 이 경계선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쟁 수행 때문에 소홀하게 대처했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일본에게 당한 것을 갚아줄 날을 기다리던 이승만대통령의 대담한 선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일본의 반대(1.24)는 물론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의 반대(2.12)도 무시했다(2019년 지금도 한국 정부는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무슨 일이든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솔직하게 불가능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도움으로 북한과 전쟁을 치루고 또 경제원조로 먹고사는 입장에서,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1954~1959 사이 미국의 원조에 의한 대충자금이 우리 정부 재정에 차지하는 비율이 43%였다. 독립국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이 대통령은 인접한 ‘한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 유지’를 위해 평화선을 선포했다고 큰 소리쳤다. 더 나아가 조병옥 내무부장관,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을 불러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한다.

평화선 선포 이후 한국은 일본어선 328척을 나포하고 일본 어부 3,929명을 붙잡아 억류했고, 나포 과정에서 44명의 일본 어부들이 사망하거나 다치는 등 강력하게 대응했다.

이승만 정부의 이러한 강경 대응(이를 위해 이승만 정부는 내무부 치안국 경비과 소속으로 별도의 해양경찰대도 1953년 창설했다)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1945), 아르헨티나(1946), 칠레(1947) 등 외국의 사례를 감안한 것이어서 일본과 미국의 항의를 묵살할 수 있었다.

이 ‘평화선’ 선포 이후 한일국교가 정상화 되는 1965년까지 13년간 한-일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선 때문에, 특히 독도 영유권을 놓고 주변의 파고가 높았다.

평화선 선포 직후(1952.2.4.), 일본어선 제1 대방(57톤급)호와 제2 대방( 57톤급)호가 제주도 남쪽의 평화선을 넘어 와 고기를 잡다가 적발돼 나포 도중 총격으로 제1 대방호 어로장(漁撈場)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측 자료를 보면 “총상을 입은 선원에 대한 치료는커녕, 나머지 선원들에 대한 음식 제공도 없어서, 어선에 있던 식료품을 가져와 연명했다”고 돼 있다. 6.25전쟁 중 제주도의 사정을 감안하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이 후 경찰은 일본 선원에 대해 영해를 침범했다는 조서를 쓰게 한 뒤 날인을 받아 일본에 통보하고, 당시는 아직 미군정 치하에 있던 일본인지라 어선은 미 해군 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으로 돌아갔다(그 뒤 한국 정부는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을 돌려주지 않고, 해경 경비 보조선, 실습선 등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여론은 끓어올랐지만, 이 대통령은 “단속을 더욱 엄정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에 맞서 일본은 해상보안청 감시선을 출동시켜 한국 경비정과 실력대결을 벌이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또 일본은 미 공군에게 독도를 폭격 훈련장소로 쓰라고 제안했고, 미국은 이를 수락해(1952.7), 9월에는 폭격훈련까지 실시한다(제2차 독도폭격사건).

이러한 한-일 간의 다툼에 곤란해진 것은 미국이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 과정에서 일본의 로비와 농간(?)에 넘어 간 미국은 두 독립국 사이의 분쟁에 대해 어느 쪽도 편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정치 역학상 미국은 일본의 편을 들어 주었지만, 그렇다고 한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일 양국이 평화선을 둘러싸고 극심한 대치 상황을 연출하자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1896~1884, 맥아더, 릿지웨이에 이어 3대 유엔군사령관으로 6.25정전협정의 서명자이다)대장이 <클라크 라인>을 선포(1952.9.27)한다.

일본 어선의 월선을 단속하는 ‘맥아더 라인’과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에 이어 한반도 주변에 그어지는 3번째 선이었다(지금 남북한 간에 논의가 되고 있는 NLL 즉 해상북방한계선도 ‘클라크라인’에 포함된다).

클라크 사령관은 한반도가 푹 들어가는 복주머니 같은 선을 삥 둘러치고는 “북한, 중공은 물론 제 3국의 선박도 이 선을 넘지 못하게 함정을 동원해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클라크 라인’은 독도 해역이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평화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어서 일본과의 해상 대치는 자연스레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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