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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58):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獨島) (9): 안용복의 2차 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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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3일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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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 봄(5월),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2차 도일이다. 안용복은 허가없이 국경을 넘어간 죄(1차 피랍, 1693년) 때문에 2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뒤 억울하기도 하고 또 울릉도 등지를 넘나들며 고기잡이를 하고 나무를 베어가는 일본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하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 것이다. 울릉도에 있는 <안용복기념관(安龍福紀念館)>은 두 번째 도일(渡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국가의 허락없이 월경(越境)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안용복은 1696년 울산 출신의 어부들, 전라도 승려 뇌헌 등 11명을 태우고 울릉도로 향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 주민을 몰아 내고, 그들을 뒤쫓았다. 그는 미리 준비한 관복을 입고 배에 ‘조울우산양도감세장(朝鬱于山兩島監稅將)’이란 깃발을 달았으며, ‘조선팔도지도’를 지참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안용복 일행은 돗토리번으로 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울산에서 출발했으나, 돌아 올 때는 강원도 양양[襄陽]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돌아온 즉시 체포돼 비변사(備邊司)에서 심문을 받았다. 비변사에서 심문받은 안용복의 진술 내용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1) 1696년 5월 울릉도에 돗토리번 사람들의 배가 나타나 그들을 쫓아 자산도(子山島 = 于山島 = 獨島, 안용복은 독도를 가리키는 于山島의 ‘于’를 ‘子’로 착각한 듯하다)까지 갔다. 이어 이들을 추격하다 표류해, 오키섬에 도착했다.
2) 오키섬에서 안용복은 “3년 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일본 관백(關白, 장군)의 서계[書契,외교문서]를 받았으나, 약속을 어기고 일본인들이 조선의 두 섬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을 규탄하기 위해 돗토리로 간다”고 말하고, 돗토리번 호키(伯耆)까지 건너갔다.
3) 돗토리번에 도착한 안용복은 3년 전 일본 측이 써준 서계를 대마도주가 뺏었으므로, 막부에 그 죄상을 고발하는 상소문 작성을 돗토리 번주로부터 허락 받았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대마도주의 아버지(宗義眞은 제3대 도주로 4대 도주인 宗義倫이 2년 만에 죽자 동생 宗義方을 5대 도주로 삼고 섭정을 하고 있었다)가 에도(江戶)에서 급히 달려와 “그런 상소문을 올리면 자신의 아들인 대마도주(소 요시미치, 宗義方)가 사형을 당할 것”이라며 간절하게 사죄하면서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시키겠다”고 약속해, 상소문은 올리지 않았다.
4) 그 대신 안용복 일행은 돗토리 번주와 대마도주 아버지 등 두 사람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이미 조선 땅”이라는 인정을 받고, 다시 배를 타고 고국[朝鮮]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일본 막부가 1696년 1월에 울릉도 도해금지령[竹島渡海禁止令]을 내렸는데, 안용복이 울릉도에 간 5월에 일본인들이 거기에서 어로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일본측이 안용복의 진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대한 답(答)-설명-이다. 당시 일본측 기록을 살펴보면 에도막부는 1월에 도해금지령을 내렸으나, 이 내용이 돗토리번의 호키에까지 전달된 것은 8월 1일로 기록돼 있다.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을 거쳐 돗토리번으로 들어 갔다는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그제서야 연초에 내린 도해금지령을 돗토리번에 전달한 것이다. 따라서 안용복 일행이 도착했던 5,6월 무렵에는 돗토리번은 물론 오키섬에서도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지난 2005년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무라카미 가(家)에서 공개한 문서인 <겐로쿠 9 병자년 조선배 착안 한 권의 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券之覺書)>에는 1696년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에 기착했을 당시 오키 섬의 관리가 안용복을 조사한 내용이 기록돼있다. 이 문서에는 “안용복이 조선팔도 지도를 꺼내 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가 속해 있다”고 하였다. 즉 안용복의 비변사 진술이 일본 기록에서도 확인이 되고, 결국 안용복 일행의 행동이 조선과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분쟁을 완전히 끝내는데 기여한 것이다.
일본 도항(渡航)과 관직 사칭 등으로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해 내정은 물론 국방이나 외침 등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에서 심문을 받은 안용복은 사형(死刑)을 선고받았다. 당시 노론(老論)측은 사형을 주장했으나,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가 청구영언에 실려 있듯이 우리에게 익숙한 중신이다) 등 소론(少論)측은 “태종 이후의 공도정책을 어기고 관리를 사칭한 것은 맞으나, 안용복 덕분에 울릉도와 독도를 지켰다”며 감형을 주장해, 숙종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고 안용복은 유배(流配, 귀양)를 떠났다. 그 후 안용복의 행적은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울릉도 쟁계’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정식으로 문서 교환이 끝난 1699년 모두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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