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혼(魂)을 담는 방짜유기장 외길 52년
|
|
중요무형문화재 77호 유기장 이봉주 옹
납청양대 스승 ‘탁창여 공덕비’ 세우기 정성 기울여
한국인 마음 담는 방짜유기로 문경‘납청유기촌’ 각광
방짜 맥 잇는 아들 이형근씨, 공예품경진 유기부문 대상 수상도
|
|
2009년 11월 05일(목) 05:51 [주간문경] 
|
|
|
| 
| | ⓒ (주)문경사랑 | | 전국 곳곳에서 애용되었던 유기(鍮器·놋제품)는 한국인의 마음을 담아내는 민속용기로 한국인 누구에게나 친숙했던 제품들이지만 현대식 합금제품이나 화학제품에 밀려 지금은 일상 생활용품으로서의 자리를 잃었다.
| 
| | ⓒ (주)문경사랑 | |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807의 1 일대 ‘납청유기촌’에서 외길 52년 장인(匠人)의 길을 걸으며 혼(魂)이 담겨 살아 숨쉬는 납청 양대유기(良大鍮器), 이름하여 방짜유기의 맥을 이은 중요무형문화재 77호 유기장 이봉주(李鳳周·83)옹이 그 밀린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옹은 지금 이곳 유기촌에 방짜유기의 스승이자 그 맥을 잇게한 주인공인 고 탁창여씨의 공덕비를 세우는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 
| | ⓒ (주)문경사랑 | | 1000년이상 거뜬히 지탱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방짜유기 스승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각이라는 뜻을 기려 지붕도 방짜기와로 이었다.
| 
| | ⓒ (주)문경사랑 | |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출생의 이봉주 옹은 1948년, 22살에 납청마을 양대(방짜)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공산주의자들이 납청마을의 유기공장을 모두 폐쇄하자 고향을 떠나 월남했다.
이 옹은 같은 평북 정주 출신의 유기장 고 탁창여씨의 서울 양대 유기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방짜유기에 전념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납청양대(방짜)의 맥을 잇게한 평북 정주군 박천면 출신의 고 탁창여(1898년생)씨는 1948년 서울에 정착하여 유기업을 하며 3·8선을 수차례 넘나들면서 납청 대장들을 월남 시켰는데 당시 원대장 김찬규, 김의선, 김봉섭, 김봉근, 김병훈, 김농도, 박은항, 박은각 등 월남시킨 장인은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이옹은 전했다.
이 옹은 1958년 탁씨로부터 독립하여 서울 구로동에 방짜유기공장을 설립하고 전통적인 납청 방짜유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 
| | ↑↑ 이봉주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좌>과 아들 이형근 유기장<우 뒷쪽> | ⓒ (주)문경사랑 | | 1978년 경기도 안양으로 공장을 이전, 박달동에 납청유기공방(1981년)을 설립하고 1982년에는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83년 무형문화재 제77호 방짜유기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이봉주 선생과 함께 유기장 부문에 안성의 김근수(주물), 벌교의 윤재덕(반방짜)씨가 선정됐다.
1988년부터 8년간 사단법인 전통공예기능보존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동안 1991년 ‘납청양대’(방짜유기)를 저술 했다.
1993년 특대의 징(지름 161㎝, 무게 98㎏)을 제작해 눈길을 끌었으며 그의 작품은 1983년작 ‘방짜좌종’과 12첩 반상기인 ‘임금님수라상’등이 유명하다.
이옹은 1993년 국립박물관 개관 전시용 작품(제기, 반상기 등 128점)을 기증했으며, 1999년에는 조달청 문화상품 조달물자로 징, 꽹가리가 지정됐다.
오오사카 문화원에도 전시작품(제기, 반상기 등)을 기증했으며 1998년 ‘이봉주공방’ 운영에 나서던중 2003년 문경으로 이전해 지금의 ‘납청유기촌’을 조성 했다.
| 
| | ↑↑ 이봉주 옹의 스승인 탁창여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 | ⓒ (주)문경사랑 | | 이곳에 들어서면 100평, 110평짜리 주공방 2동과 100평 짜리 전시·판매장 겸 사무실 건물과 재래식 공방 1동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 온다.
83세 노령 답잖게 직접 대장 일을 하는 이옹의 모습은 방짜유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집념의 혼, 그리고 고향 납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함께 작품에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 | ⓒ (주)문경사랑 | | “문경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동안 7번이나 이사를 다니고 8번째 찾은 곳이 이곳입니다. 가는 곳마다 홀대를 받았던 기억을 하고싶지는 않지만 이곳 문경, 특히 가은 사람들의 인심이 너무 좋아 자랑을 하고 싶어요. 이제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납청방짜유기촌(納請方字鍮器村)을 일구고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정착하려할 당시 김학문 전 문경시장과 김대영 전 문경시의회의장, 전 김정길 가은읍장 등의 도움이 컸다는 점도 누누히 강조했다.
“1960년께 산림법이 개정 강화되고 일반 가정의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면서 연탄가스에 변색이 잘 되는 유기의 소요량이 급격히 줄어 마침내는 쓸모없는 고물로 취급되어 고물상 수집용 고철이 됐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유기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유기를 제작하던 대장(기능인)들 역시 새 삶의 길을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부연 설명이다.
일반인들 중 방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방짜유기는 정확하게 78%의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우리나라 전통적인 금속공예 기법으로 제작한 무독, 무취의 무공해 금속으로 건강에도 유익하여 선조들이 수 천년동안 사용해 왔던 생활공간의 예술품이다.
특히 성형할 때 두드린 메자국(울퉁불퉁한 자국)은 수공예품으로서의 은은한 멋과 품위가 풍겨 그 격을 한층 더한다.
이 옹은 전통기법을 전수하여, 용해 →네핌질 →우김질 →냄질 →닥침질 →제질 및 담금질 →벼름질 →가질 등 8가지 제작과정을 거쳐 유기를 만든다.
납청유기촌에서는 20여명 직원들에게 방짜유기의 제작 기법을 전수시키고 있어 가은읍이 국내 최대의 방짜유기촌으로 각광받을 날이 올 전망이다.
이 옹은 방짜유기를 생명의 그릇이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미나리에 붙어 처치 곤란한 거머리를 놋수저로 물리쳤다고 한다. 해충을 쫓아내는 신비한 효능만이 아니라 어느 대학에서 실험 결과 식중독을 일으키는 O-157균을 방짜 안에서 배양하면 하루도 안 돼 모두 사멸되는 멸균 효과도 있다고 했다.
“농약이 묻은 과일, 채소 등을 방짜 용기에 담으면 그 주변이 까맣게 변합니다. 그렇게 하루 정도 보관 후 다른 방짜 용기에 그것을 담으면 더이상 변하지 않아요. 방짜가 나쁜 균에 반응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해독한다는 사실이죠. 변색된 것은 설거지만으로도 제 색깔로 돌아오니 염려 없이 써도 되고요.”
이봉주 옹이 어렵게 지켜온 우리의 문화 유산. 아들 형근씨가 방짜기술을 이어받고자 쇠를 녹이고 망치질을 해대는 모습이 이옹을 흐뭇하게 한다. 가업을 이어 받은 이형근씨는 1989년 제19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대회 사상 최초로 유기 부분 대상을 받아 아버지에 이은 방짜유기 제조 기술력을 인정 받아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윤상호 편집인 mginews@daum.net
|
|
|
|
편집인 기자 “주간문경을 읽으면 문경이 보인다.” - Copyrights ⓒ주간문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간문경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주간문경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