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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2026년 05월 19일(화) 17:34 [주간문경]

 

 

↑↑ 정창식
갤러리 문경공간-아름다운선물101 대표
법무사

ⓒ 주간문경

 

최근 문경문화원의 문화교실 프로그램강좌인 문인화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문인화는 옛 선비들이 취미나 수양의 방편으로 그린 수묵화를 일컫는다. 문인화의 대상이 되는 소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난과 대나무, 매화 그리고 국화 등 사군자와 수묵 산수화가 대표적이다. 수업 첫날 선생으로부터 난(蘭) 그림을 채본 받았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듬뿍 먹물을 찍어 붓으로 난 잎을 흰 화선지 위에 한껏 그려 넣었다.

예상대로 그림은 말이 아니었다. 우선에 붓질하는 방법부터 틀렸다. 다음 수업을 기약했다. 그러다, 일주일 동안 붓 한번 들지 못하고 바쁘게 지나갔다. 선생은 다시 채본 그림 한 점을 주었다. 이번에는 꽃대였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다음 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렇지만 또 일주일의 시간이 그냥 지나갔다. 여전히 낯선 붓과 손은 화선지 위에서 급하게 휘달리기만 했다. 한달이 되어갈 무렵, 이번에는 난꽃까지 그려진 채본 그림을 받았다. 결국 한달이 지나갔음에도 난은 잎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이었다.

어느 날 서가에 꽂힌 도록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1985년도에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한국의 미(美)”라는 천연색 도록 시리즈였다. 그 가운데에‘화조 사군자’편을 펼쳤다. 몇 점 없는 조선 시대 난(蘭) 그림이 보였다.

난 그림으로 대표적인 이는 석파 이하응과 추사 김정희, 그리고 운미 민영익이다.

사람들은 이하응과 김정희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민영익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적지않다. 민영익은 개화기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서 정치적으로 부침을 거듭하였다. 말년에 상해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그곳에서 청나라의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난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이하응의 난을 석파란이라고 한다면, 민영익의 난은 그의 호를 따서 운미난이라고 분류할 정도이니 그가 그린 난이 상당했음이 틀림없을 듯 하다.

“이하응의 난은 가늘고 섬세하며 추사의 난은 두텁고 잎이 불규칙적인 특징이 있는데, 민영익의 난 잎은 먹을 넉넉하게 하여 짙고 굵기가 일정한 면이 있어요.”

언젠가, 수업 시간에 문인화를 가르치는 소여 박광모 선생으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도록에 나와 있는 이하응의 묵난(墨蘭) 한 점은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이 발제했는데, 고준절벽에 허공을 향해 긴 난잎들이 뻗쳐있다. 담묵과 흑묵이 교차하며 아래위로 서로 대비되어 그려진 두 폭의 난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이하응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난, 특히 불이선란(不二禪蘭)를 보면 일반적인 난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마주한다. 그는 묵을 엷게 조묵(造墨)하여 난 잎과 꽃을 담백하게 가운데에 그려 넣었는데, 여백에 빼곡하게 화제를 써 내려갔다.

“…문을 닫고 깊이 깊이 찾아드니, 예가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

추사는 문기와 서권기를 존중하였다. 그리고 난초 그리는 법에 있어서 문자(文字)의 향(香)과 서권(書卷)의 기미(氣味)가 있은 연후에 그 뜻을 얻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화론(畫論)이기도 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그린 이 난을 추사의 화론에 가장 알맞은 그림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살펴보면, 글씨는 그 사람과 닮아있다고 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은 이를 말함이다. 추사와 이하응, 민영익의 난(蘭)이 그들 자신을 닮은 것이 분명하다면, 지금 그리고 있는 늘 첫날에 그린 것 같은 여전한 난 그림도 분명 날 닮았음이 당연하다.

추사가 그토록 강조했던 문자향과 서권기는 학문과 내면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외부적 표현일진데,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알고 이제라도 정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해야겠다.

주간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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