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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짐지고 걷다가

2025년 04월 08일(화) 17:07 [주간문경]

 

 

↑↑ 정창식
문경문화원 부원장
갤러리 문경공간-아름다운선물101 대표
법무사

ⓒ (주)문경사랑

 

민병찬 시인을 안 것은 오래전이었다. 사실 그보다 시가 먼저였다. 정확히 말하면 시조이다. 수년 전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문경과 관련된 시집을 접했었다.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대충 흝듯이 넘어갔다. 그러던 중 어떤 시조에 눈이 고정되었다.

‘대성암’이라는 시조였다. 그 시조에서 언뜻 ‘여승방’, ‘빈 뜨락’, ‘선방’, ‘고무신 두켤레’, ‘절 그림자…’ 등의 시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자세를 바로 하고 읽어내려갔다. 그 시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싯구(詩句)들과 함께 시적 긴장이 이어졌다.

그러다, “샘물이 혼자서 종일/ 절 그림잘 헹구더군…”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침내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는 듯했다. 그 뒤에 시인이 묘사하는, 길손에게 운달산 가을 소식을 전하는 절 앞의 어능나무 열매 등은 무너진 시적 긴장을 토닥여주는 하나의 풍경처럼 읽혀졌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대성암은 어느새 자주 찾는 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어 속의 절 앞의 두 그루 어능나무와 댓돌 위에 스님 신발은 현실이 되었다. 어느 때는 돌확 안의 샘물이 혼자서 종일 절 그림잘 헹구는 모습을 한동안 보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대성암은 그가 지은 시와 동의어였다.

다시 그의 이름을 접한 것은 지난해 여름 무렵이었다. 평소 존경하는 망년우(忘年友) 최창묵 선생이 카톡으로 우리 지역의 명소 주암정(舟巖亭) 그림과 시조를 보내주었다. 화가(畫家)와 시인(詩人)은 모두 민병찬 시인이었다. 그의 이름에 반응하듯 그림과 시조를 번갈아 보며 주목했다. 그러다가 먼저 시조를 읽어내려갔다. 세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였다. 두 번째 수가 깊은 여운으로 들어왔다.

“비단내(錦川) 감아도는 배바위에 덩실앉아/ 푸른숲 그늘 속에 시 읊으며 노닐던 집…”

금천가에 위치한 주암은 17세기 유학자 주암 채익하가 시 읊으며 노닐던 곳이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석문구곡을 지은 근품재 채헌도 농청대를 지나 이곳에서 주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농청대의 주인 청대 권상일도 청대구곡을 돌아보고 이곳에서 금천의 풍광을 감상하였을 터이다.

시인은 시조의 종장에서 마침내 이렇게 탄식하였다. 그 탄식은 함께 전이(轉移)되었다.

“청초한 그 젊은 선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나.”

민병찬 시인은 우리 지역 산양면 굴골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1960년대 동인회〈나래〉의 창회(創會) 동인으로 나래문학상, 호남시조문예상, 정석주문학상을 수상하고 최근까지 시조집 4권과 시조화집 1권을 발간했다고 한다.

시인은 우리 지역 출신의 세계적인 한국화가 임무상 선생과는 문경중학교 동기라고 했다. 문득, 시인과의 인연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무상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의 소개로 시인과 연락이 닿았다. 시인은 밝고 인자한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시인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은 것은 며칠 뒤였다. 2021년에 시인이 팔순 기념으로 출간한 시집 『뒷짐지고 걷다가』, 시조화집 『남한강 서정抒情』두 권이었다. 고희가 지나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시인은 그림마다 화제시조(畫題時調) 한 편씩을 빠짐없이 짓게 되었다고 한다.

시조화집은 300여 편의 그림과 시에서 100편을 각 추렸고 별도로 네 번째 시조집도 함께 내었다. 나이와 무관한 그 굳은 입지(立志)와 연마(練磨)의 부지런함에 대한 내공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했다. 그의 시집의 표제(表題)가 된 시,『뒷짐지고 걷다가』에서 짐작해보며 잠시 옮겨 본다.

“…부질없단 그 말조차 부질없는 이쯤에서/ 늦을까, 남은 그 한 마디 아아 지금 하지 않으면,”

아아 시인은 늦었음을 이유로, 지금 하지 않으면 하고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은 청초하지만 불민(不敏)한 고향 후배가 성공한 노 시인의 건강과 더없는 발전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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