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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 도천 천한봉 선생 소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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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09일(화) 17:49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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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정창식
아름다운선물101
문경문화원 이사 | ⓒ (주)문경사랑 | | “갑자기 호흡이 어렵다고 하셔서 서울 큰 병원으로 모셨는데….”
대한민국 도예 명장 도천 천한봉 선생이 영면하셨다. 가을의 정취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한창 도시를 빠져나가는 때에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몇 년 전 선생을 도천도자미술관에서 뵈었을 때 유장하게 흐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선생의 맏사위인 박윤일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 부회장이면서 문경북사랑클럽 회장은 전화기 너머에서 고인을 회고하고 있었다.
“장인어른은 조선다완처럼 소박하고 욕심이 없고 검소하게 사셨어요….”
그럼에도 이웃을 위한 일은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문경읍내의 독거노인들을 위해 베푸시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늘 이웃과 사회에 아낌없이 기부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에게는 인색하셨어요. 한때에는 그게 서운하고 아쉽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것을 보고 받아들였지요.”
장례에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기와 조화가 넘쳐났다고 한다. 밀려오는 조화를 감당하지 못해 100여개는 리본만 떼고 돌려보내야 했다. 조문객 중에는 뉴스를 접하고 왔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추모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괴산 호국원에 안장을 했어요.”
그랬다. 선생은 6․25 참전용사였다. 그는 6․25 전쟁 당시 8사단에 복무하면서 국군포로가 되기도 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료부족으로 군복무가 인정되지 않아 재 입대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생전에 선생은 그것을 한(恨)으로 여겼으나 2013년에 6․25 참전이 인정되어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았다.
“문경도자기협동조합장으로 장례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는 영광이었습니다.”
문경도자기협동조합 이사장 오정택(월봉요) 장례추진위원장은 선생을 조합인들의 손으로 보내드린 것에 큰 보람을 느끼듯 말했다.
노제(路祭)에서 선생의 영정은 도자기박물관과 장작가마를 둘러보고 선조도공추모비에서 헌다의식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번 노제는 앞으로의 선례로 남게 되었다.
오정택 위원장은 추모사에서 “사람이 태어나 생을 마감할 때는 마치 소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선생께서는 하늘로 돌아가 우리에게 소중한 별이 되어 줄 것이다”라며 선생의 떠난 큰 자리를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남아있는 후배들을 선생의 너른 품으로 꼭 안아줄 것을 소망했다.
선생의 평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가 넉넉히 안다. 그러나 지나온 행장(行狀)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도리다.
선생은 2000년도 KBS TV 다큐멘터리에서 ‘조선의 마지막 도공’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세계적인 도예 강국인 일본에서 그를 “고려다완을 제일 잘 재현해 낸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반전의 미학과 공예적 가치”,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지를 넘어선 예술”이라는 최상의 헌사를 바치고 있다.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TV에서 Asia's Who'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의 도자기 분야 중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그를 소개하였다.
그는 우리 문경이 고려다완, 즉 조선 민요(民窯)의 전통을 잇는 도자의 고향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차인들에게 다완과 차도구의 옛 가치를 일깨우며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 도자문화의 저변화와 일반화에 기여한 공(功)이 정말 크다.
이제, 선생의 미술관에 걸려 있는 “계종순업(繼從舜業)”이라는 글을 되새기며 추모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그 뜻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보기 좋은 것 보다는 쓰기 좋은 것을 만들어라.”
향(香)을 올리며 재배(再拜)한다. 우리 도자문화를 꽃피운 그의 뛰어난 재능과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삶에 감사와 존경의 염을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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