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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공주님들

2019년 04월 09일(화) 15:59 [주간문경]

 

 

↑↑ 김 안 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문경대학교 석좌교수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원장

ⓒ (주)문경사랑

 

임금님의 따님을 공주라고 부르며, 이는 뭇 여성들이 흠모하고 소망하는 최고의 자리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주는 부족함이 없이 자라고 좋은 집으로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동서양의 역사에서 보면 간혹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결혼에서 실패하기도 하며 비련의 생애로 끝나기도 하는 공주도 적잖이 많았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도 이와 같은 공주가 많이 있었지만, 대표적으로 불쌍한 공주 세 사람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이야기다. 모란(牡丹)공주라고도 하는 낙랑공주는 고대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의 태수였던 최 이(崔 理)의 따님이었다. 고구려 제3대 임금인 태무신왕(太武神王, 재위 18~44년)은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 호동왕자(好童王子)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호동왕자는 연인인 낙랑공주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부왕의 명령으로 낙랑군을 정벌하는 길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낙랑군의 궁중에는 자명고(自鳴鼓)라는 북이 있었는데, 국경을 넘어오는 외군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혼자서 울기 때문에 언제나 이를 막아낼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호동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자명고를 찢어 울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손쉽게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공주는 나라와 사랑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그 북을 찢어버리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태수는 직접 자기 딸을 칼로 베어 버린다.

호동은 손쉽게 낙랑군을 함락하고 나서 이미 죽은 공주를 안고 슬피 운다. 개선한 호동은 원비(元妃)의 무고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자살하게 된다. 이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것은 서기 32년의 일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라는 주제의 노래를 지어부르니 그 첫 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호동왕자 말채찍은 충성충자(忠誠忠字)요 모란공주 주사위는 사랑의 자(字)일세. 사랑이냐 충성이냐 쌍갈래길에 자명고를 찢고서야 울어본 공주.’

다음은 평강(平康)공주의 이야기다. 고구려 제25대 임금인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년)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하도 잘 울어서 ‘울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왕과 왕비는 그 딸이 울 때마다, ‘그렇게 울기만 하면 나중에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낼까부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이 말을 자주 들은 그 딸은 장성하여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좋은 혼처를 다 마다하고 부모님이 늘 이야기하던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우겼다. 평양 근방 깊은 산속에 온달(溫達)이란 청년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도 하고 숯도 만들어 팔면서 살고 있었는데, 거의 바보에 가까워 인근에 ‘바보 온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밤 공주는 그동안 모은 금붙이를 싸들고 온달 모자가 살고 있는 산속의 움막을 찾아가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온달과 결혼해서 같이 살았다. 정성을 다해 남편에게 글을 가르치고 무술을 연마시켰다.

오랜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나라가 개최한 무술경연대회에서 특별히 우수한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있어 그를 치하하고 장수로 특별 채용하였다. 그가 바로 바보 온달이고 더욱이 그의 부부가 그렇게도 찾던 자기의 딸임을 안 평원왕의 놀라움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온달은 승승장구하여 대형(大兄)이란 높은 자리의 장군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서기 590년에 한북(漢北)의 땅을 찾고자 벌린 신라와의 전투에서 애석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만인이 바보라 일컫던 사람과 결혼하여 숱한 고생과 노력 끝에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던 평강공주의 슬픔과 비통함은 어떠했을까? 충북 단양(丹陽)에 있는 온달산성(溫達山城)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끝으로 또 한 사람의 공주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918~943년)의 장녀인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고려 개국과 신라 멸망의 와중에 있었던 세기적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공주는 아버지를 따라 개성과 경주를 오가는 가운데 신라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년)의 장남인 태자 김 일(金 鎰)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기울어지는 국운을 회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경순왕은 전쟁으로 인한 백성의 괴로움을 막고자 천년사직의 신라를 고스란히 들어 왕건에게 바쳤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은 자기의 장녀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주니, 때는 서력 935년이었다.

졸지에 나라를 잃고 연인마저 아버지에게 빼앗긴 태자는 단발령(斷髮嶺) 고개에서 머리를 깎고 개골산(皆骨山, 지금의 금강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그 곳에 묻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아픈 가슴을 안고 결혼한 공주는 남편을 따라 경주와 제천, 개성과 개풍 등지를 전전하면서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낳았으니, 자식 복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맏아들인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은 고려조 초기에 평장사(平章事)․시랑(侍郞)․시중(侍中)의 벼슬까지 지냈으며, 경주김씨 시조인 알지(閼智)의 29대손이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이 분의 38대 직계후손이니, 낙랑공주 왕씨(王氏)는 바로 나의 39대조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비련의 할머니는 이렇게 한 세상을 살다가 가셨다.

여기 소개된 공주와 같은 경우는 이야기로는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실제 그 일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괴롭고 슬프기가 한이 없을 것이다. 다시는 이러한 비련의 공주, 나아가 통한의 여인이 생겨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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