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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74):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25): 일본, 독도 편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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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11일(월) 08:49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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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강성주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 (주)문경사랑 | | 다음은 울릉군수 심흥택이 직속상관인 강원도관찰사 서리 이명래(李明來) 춘천군수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이다.
심흥택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서인지 중앙정부의 내부(內部, 내무부)로도 같은 내용으로 직보(直報)를 올린다. 이 사실은 1906년 5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잡보(雜報)란에 실린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본군(本郡) 소속 독도가 외양(外洋) 100여리 쯤에 있사옵드니 본월 초 4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쯤에 윤선(輪船) 1척이 군내 도동포(道洞浦)에 정박하였는데, 일본 관인 일행이 관사로 와서 스스로 이르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領地)가 된 고로 시찰차 방문했다”고 하는 바, 그 일행은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오키 도사(隱岐 島司) 히가시본스케(東文輔) 및 사무관 진자이요시타로(神西由太郞), 세무감독국장 요시다헤이고(吉田平吾), 분서장(分署長) 경부(警部) 가게야마간파치로(影山巖八郞) 및 순사 1인, 회의원(會議員, 縣議員) 1인, 의사, 기수(技手) 각 1인, 그밖에 수원(隨員) 10여인이 먼저 호구수.인구.토지 및 생산의 다소를 묻고 다음으로 인원 및 경비가 얼마인지를 물으며 제반 사무를 조사할 양으로 녹거(錄去)이옵기 이에 보고하오니 밝게 살피심을 삼가 바랍니다.“
심 군수는 “독도가 울릉군 소속”이라고 앞머리에 밝히면서 관찰사 서리인 이명래 춘천군수에게 바로 보고했고, 이명래는 이를 다시 중앙정부의 의정부 참정대신[朴齊純]에게 보고했는데, 이 날이 광무(光武) 10년(1906) 4월 29일이다.
그리고 이 시마네현 조사대 45명 가운데는 독도 편입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수산업자 나카이(中井養三郞), <죽도와 울릉도>의 저자인 오쿠하라(奧原碧雲)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명래 관찰사 서리의 보고에 대해 의정부 참정대신은 5월 20일 지령 제3호로 다음과 같이 회신한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설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고하라.”
그러나 조사하면 무엇하고, 보고하면 무엇하나? 대한제국은 1년 전인 1905년11월 일본과 맺은 <제2차 한일협약>(일명, 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外部는 1906.1.17. 폐지)였기 때문에 어떠한 외교적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이 지령을 내린 박제순은 <을사늑약> 체결을 찬성한 다섯 명의 매국노[을사오적,乙巳五賊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가운데 한 명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던 친일파이지만,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몰랐고, 이러한 보고를 받은 뒤에는 묵인할 수도 없었다.
<을사늑약>은 제1조에서 “일본국 정부는 재(在)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체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제3조에서는 통감(統監) 1인을 두도록 해, 한국 침략에 발 벗고 나선다.
이 조약 체결 직후 서울에 있던 외국 공사관은 모두 철수하고(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으니까) 초대 통감으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취임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고, 국권을 하나씩 탈취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외교권을 탈취하기 전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 ~1905>으로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를 몰아낸다. 그리고는 군사기지 사용권(1904.2. 한일의정서)을 얻고, 외교와 재정 분야에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고(1904.8 제1차 한일협약), 당시 강대국들로부터 한국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승인이나 묵인을 받아낸다(1905년 7월 카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 1905년 9월 포츠머스조약 등).
이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1905.11 제2차 한일협약), 외교권 박탈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Hague Convention,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1899, 1907년 두 차례 개최)에 이준 등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트집 잡아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면서(1907.7), 한일신협약을 맺어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임명해 행정권을 빼앗아 가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다(1907.8).
대한제국은 이제 외교권, 행정권,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됐다. 이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박탈하고(1909.7 기유각서), 이듬해 한일합병조약(1910.8.29.)을 통해 국가 주권을 박탈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가 이 땅을 다스린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합병 9년 만인 1919년 3월 1일 <3.1만세 운동>이 요원의 불꽃같이 일어나고,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성돼 광복을 위한 피눈물 나는 여정이 계속된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해방될 때 까지, 독도 문제는 없었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는데, 동해의 외딴 섬 독도가 국민들의 머릿속에 살아 남아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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