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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59):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獨島) (10): 안용복과 박어둔

2018년 11월 13일(화) 09:50 [주간문경]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같이 이런 “외교적 업적”을 남긴 안용복은 어떤 인물일까? 당연히 외교관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 보면 ‘옛 고구려(高句麗) 땅을 내놓으라’며 고려(高麗)를 침략(993년)한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을 물리치고, 도리어 땅(압록강 동쪽 280리, 고려는 이 땅에 ‘강동 6주’ 설치)을 얻어낸 서희(徐熙)를 ‘외교(外交)의 달인’이라고 칭송하는데, 그렇다면 관직을 사칭하면서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안용복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의문에 부딪힌다.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자. 앞에서도 말했지만 17세기 당시 조선은 세수원의 확보와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울릉도와 독도에서 살던 주민들을 본국으로 이주시킴[刷還政策]과 동시에, 비어있는 섬에 왜구가 침입해 정착하지 못하도록 이들을 수색해 토벌하는 관리[搜討使]를 정기적으로 파견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연속된 흉년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었던 조선 동남부해안 주민들은 국법을 어기고 비밀리에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며 조업을 했으며, 일본의 어부들도 조선의 쇄환정책[海禁, 空島政策]을 악용해 몰래 건너와서 이 두 섬의 산림자원과 수산자원을 훔쳐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어부와 일본인 어부가 조업권을 두고 갈등을 빚게 된다.

안용복은 이름을 빼고는 생사의 시점도 뚜렷하지 않다. 에도막부 돗토리번의 관리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嶋正義)가 지은 <죽도고, 竹島考, 1828년>를 보면, 안용복이 1차 피랍(1693) 때 자신의 나이를 ‘42살’이라고 말했다는 데 근거를 두면 1652년 생(生)이고, 숙종 16년(1690)에 발급된 본인의 호패(戶牌)에 ‘33살’로 된 데 따르면 1658년 생이다. 이 둘 중 조선의 공식 기록인 호패에 신뢰를 둔다면 그는 1658년생이 된다. 사망연도는 기록에 없다.

또 안용복의 호패에는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主京居吳忠秋)”라고 돼 있어, 그의 신분이 사노비(私奴婢, 공노비가 관청 소속이라면, 사노비는 권문세가 소속)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성호사설, 星湖僿說,1760> ‘울릉도 조’에서 안용복을 “영웅호걸”이라고 칭하면서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행하게 했어야 한다”고 기록하지만, 신분에 대해서는 부산 동래부 전선(戰船)의 노(櫓)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분이 높지는 않았을 것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겠다.

또 그는 거주지가 부산 좌자천 일리 십사통(釜山 佐自川 一里 十四統, 지금의 부산 동구 좌천동 부근)으로 왜관(倭館),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과 가까운 곳이다. 이익도 “동래부의 노꾼으로 왜관을 드나들어 일본말을 잘했다”고 기록하고 있어,두 가지 기록이 상당히 합치한다. 그러나 당시 독도를 가리키는 우산도[于山島]를 자산도[子山島]라 하거나 일본에서의 기록 중에 전남 순천[順天]을 한자로 쓰지 못하고 가타카나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 한자[漢字] 보다 일본말에 더 능숙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기민함과 담대함, 영리함을 갖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행적을 보면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는 이익의 평가가 과장이 아님이 드러난다.

“꾀어서 데려갔다”라고 표현된 안용복의 1차 도일(渡日)은 그의 인생에서 변곡점이 된다. 안용복은 인질이 됐지만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조선 사림이 조선 땅에 갔는데 자신을 억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강력히 항의하자, 이에 놀란 호키[伯耆] 태수[太守]는 안용복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막부로 보내면서 신병처리 등에 관한 지침을 요청했다. 막부는 “안용복 등을 나가사키(長崎)로 이송해 조선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내용의 서계를 써주게 했다.

사실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 문제는 이때 잘 정리가 됐다. 단지 그 이후의 역사가 그것을 훼손 또는 부인하도록 흘러간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7년 1월 안용복을 기려 ”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國土守護 其功不滅)“이라는 휘호를 <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에 내리기도 했고, 부산 수영사적공원에는 그의 충혼탑이 서있다.

또 한가지, 안용복의 1차 도일 때 함께 간 박어둔(朴於屯)에 대해서 최근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일본 피랍(1693) 이후 귀국한 이들은 불법 월경죄로 안용복은 곤장(棍杖) 100대, 박어둔은 곤장 80대를 맞았다. 지난 2010년 박어둔의 고향인 울산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서는 “교과서 등에 울릉도쟁계가 안용복 개인의 영웅담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또 2015년에는 울산 온산읍 방도리 출생인 박어둔은 울산의 염간(鹽干, 소금상인)으로 안용복의 두 차례 도일(渡日)활동의 재정적(財政的) 후원자였으며, <숙종실록> (20년 2월조)과 <변례집요(邊例集要,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조선 외교 실무집)>등에 보면, 안용복 보다 박어둔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는 등 소홀히 다룰 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도고>에는 박어둔의 고향이 울산 청량(靑良) 목도리(目島里) 십이통(十二統) 오가(五家)이고, 신분은 양인(良人)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양반답게 행동해 별명이 ‘도라’(虎, 호랑이)였다고 돗토리현 오키 가(家)의 문서에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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