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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50):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獨島)(1): 개항과 사회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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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3일(화) 09:30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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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영토 분쟁 중에서 우리 나라와 가장 관련 깊은 지역은 독도(獨島)다. 우리는 당연히 “독도는 우리(韓國) 땅”이라 말하지만,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固有) 영토”라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속 터지는 일이지만,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독도는 “분쟁(紛爭)중인 영토”에 해당한다. 명백한 우리 땅인 독도가 분쟁중인 영토로 바뀐 데에는 그 만한 곡절이 있다. 앞으로는 독도에 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독도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512년이다. 이 해에 신라(新羅)이사부(異斯夫)장군이 동해의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해 신라에 합병시켰다. 우산국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나라였고, 독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후 1500년간 독도는 변함없이 우리의 땅이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또 제국주의(帝國主義)의 광풍이 세계를 뒤덮던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독도(獨島)가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적도 있었으나, 한국인들은 한 번도 독도를 남의 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 나라는 현재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국 명(明) 나라를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한 조선(朝鮮)은 명 나라의 대외 정책 가운데 해금정책(海禁政策)도 그대로 모방해 쇄환정책(刷還政策 :일본학계가 쓰는 공도 정책[空島 政策]을 말하는 것으로 섬에 사는 주민들을 육지로 옮겨 가게 하고 더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의미한다)과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해 울릉도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를 어기면 처벌을 하곤 했다. 병역을 피하거나 세금을 못내고 도망한 사람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울릉도와 독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조선[한국] 사람보다 일본인[倭人] 거류자가 더 많기도 했다. 일본 막부(幕府)도 1696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朝鮮) 땅이므로 자국민들에게 그 섬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울릉도 도해(渡海) 금지령”을 내리고 위반자를 사형에 처하는 등 단속도 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베트남, 류큐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동심원(同心圓)을 그리며 살던 소위 중화(中華)세계, 중화질서는 16세기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지구에는 동양(東洋)만이 아니라 서양(西洋)도 있었다.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대항해 시대’(지리상 발견의 시대)처럼 범선(帆船)을 타고와 평화적으로 교역하던 시대가 가고 산업혁명을 마친 유럽 열강들은 “군함과 대포, 기선, 기차 등 강력한 무기와 교통수단”을 가지고 이웃 나라를 노크했다.
이름하여 제국주의(帝國主義) 시대가 왔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産業革命)에 성공한 유럽 열강들, 영국과 프랑스, 네델란드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東)으로 동(東)으로 배를 몰았다. 산업화에 성공한 이들은 생산된 상품(商品)도 팔아야 하고 또 값싼 원료(原料)도 구해야 했다. 19세기, 서양의 노크에도 문을 열지 않은 나라는 이제 지구상에 중국, 일본, 한국 밖에 없었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철선을 타고 온 이들이 해양세력(海洋勢力)이었다면 우랄 산맥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으로 검은 안개처럼 소리없이 다가오는 나라는 대륙세력(大陸勢力)의 핵심인 러시아제국(帝國) 또 중국이었다.
그 당시 서양은 기독교(基督敎) 문명을 가진 자신들만이 문명국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을 야만국, 야만인들로 여겼고, 문명국이 야만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사회와 세상이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강(强)한 자와 우수(優秀)한 자가 약(弱)하고 열등(劣等)한 자를 억압하고 정복하는 것은 사회가 진화하는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의 영향이었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될 무렵 유럽에서는 사회진화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영국 철학자요 사회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가 주장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널리 퍼진 이 사상은 생물진화론의 적자생존[適者生存]처럼 사회도 단순한 상태에서 진화해 더욱 복잡한 형태로 발전된다고 주장해, 식민지 획득, 인종 차별, 유태인 학살 등에 이론적 기초가 됐다. 비슷한 시기 서부 개척이 대충 끝난 미국은 그 축적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후발 주자로서 식민지 획득 경쟁에 뛰어 들면서, 스페인과의 전쟁[美西戰爭,1898]에서 승리해 필리핀을 식민지로 챙기자, 영국의 유명한 시인, 소설가(1907년 노벨문학상 수상)이자 백인우월주의자인 러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은 <백인(白人)의 짐>혹은 <백인(白人)의 의무>라고 번역되는 이라는 시(詩)를 발표했다.
구절마다 “백인의 짐을 져라(Take up the white man’s burden)”으로 시작되는 이 시가 대표하듯이 그는 “미개한 인종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백인의 의무(짐)”이라고 믿었다. 키플링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제국주의자들은 사회계층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열등한 원주민을 교화해 계몽시키는 것이 우월한 백인들의 사명이요 지상과제라고 진심으로 믿고 살던 시대였다. 우리보다 불과 20여년 먼저 개항(開港)하고 서양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인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무주지(無主地)‘라면서 자기 영토에 편입하고(1895), 독도(獨島)도 ’주인 없는 섬‘이라고 챙기던 때(1905)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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