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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나라는 왜 망했는가?- 28. 혁명의 시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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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운동(保路運動) 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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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2일(월) 16:15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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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혁명도 이제는 그 정점을 향해 내닫기 시작합니다. 청나라를 되살리기 위한 청 조정의 마지막 개혁이 교육, 경제, 군사, 정치 등 각 방면에서 실시되지만, 백성들이나 여론 주도층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이제 청 조정과 백성들의 이해가 철도 국유화(鐵道 國有化)를 둘러싸고 부딪히는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은 아편전쟁과 청불, 청일 전쟁이후 외국에 이권을 많이 빼앗겨 왔으나, 백성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또 각 지방에서도 재력을 가진 계층이 늘어가면서 1905년 경 부터 외국에 빼앗긴 이권 즉 광산 채굴권이나 철도 부설권 같은 것을 되찾아 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후베이(湖北)성, 후난(湖南)성, 광둥(廣東)성, 쓰촨(泗川)성 등지에서는 중국인들이 자본을 모아 철도를 건설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이를 추진했으나, 철도 사업 자체가 자본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 장치산업인데다, 이권까지 개입되니까,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했습니다.
이에 답답해하던 청나라 중앙정부는 월한선( 漢線, 광저우-우한)과 천한선(川漢線,사천-우한) 철도의 건설을 앞당기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과 <철도협정>을 체결하고(1910. 5) 철도 건설비용을 빌리기로(차관) 합니다.
이듬해 1911년 5월, 청나라는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새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순친왕이 구성한 새 내각 각료 13명 가운데 9명이 만주족, 4명이 한족으로 구성되자, 백성들의 실망이 깊어집니다. "개혁한다더니, 이게 무슨 개혁인가?"라는 불만이 형성됩니다. 또 이 새 내각이 구성된 뒤 첫 의결사항이 철도국유화입니다. 철도 건설을 민간에 맡겨 두었더니 너무 지지부진해, "외국의 차관을 빌리더라도 하루속히 철도를 건설하자"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 정부는 <월한선>과 <천한선> 철도 건설을 위해 민간들이 불입한 지분(주식)에 대한 보상도 발표했으나 투자한 자본가들의 기대에 미흡해 불만이 고조됩니다.
자연스럽게 철도국유화에 대한 백성들의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됩니다. '만주족 내각이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철도국유화를 결정하고 통보했다' '만주족 내각이 외국 자본가들과 짜고 한족을 무시했다' '외국인은 우대하면서 이미 투자한 민간인의 이권은 무시한다' 이런 여론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혁명파. 입헌파 모두 청 조정의 결정을 반대하면서 "우리의 철로를 지키자"라는 <보로운동(保路運動)>이 철도 건설과 관련된 지역에서 확산됩니다. 청 나라는 청나라대로 전쟁에서의 패배 등으로 부담해야할 배상금 지출은 늘어나는데 비해 들어오는 돈이 없어서, 이 철도를 담보로 외국에서 차관을 빌려와 빨리 공사를 마친 뒤 여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국고를 채우려고 하는 계획이 백성들로부터 외면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불씨는 먼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시작됩니다. 萬여명이 모인 집회에서 백성들은 "청나라가 주권을 팔아 먹는다"고 항의하고, 국유화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합니다. 이어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에서 만현(萬縣)까지는 노반 공사가 이미 착수됐는데도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막고 공사까지 중단시킵니다. 또 쓰촨(泗川)성 중심지인 청뚜(成都)시에서는 군인들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20여명이 사망했고(1911.9), 분노한 시위 군중들은 아예 청나라를 타도하자는 무장 폭동을 계속합니다. 청뚜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위 진압군의 지휘자가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는 등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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