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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나라는 왜 망했는가?- 27. 혁명의 시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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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맹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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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2일(월) 16:14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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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孫文(1866~1925)은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 길로 나섭니다. 혁명의 목적은 '황제 중심의 전제정치를 고집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국민의 나라를 수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손문은 혁명 준비, 실패, 망명, 또 거사 준비, 실패 등을 몇 차례 거듭하는 과정에서 보다 조직적이며 통일적인 혁명운동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청나라 유학생이 많은 일본의 도쿄에서는 러시아를 규탄하고 이에 대항하려는 유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중국 유학생들은 의화단의 난을 핑계로 만주에 파병된 러시아 군대가 사태가 끝난 뒤에도 철수하지 않는데 대해 항의하고 이에 대항하는 유학생 의용군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 정부는 철병 약속을 자키지 않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유학생들이 "러시아를 핑계로 혁명을 준비한다"며 도리어 유학생들을 탄압했습니다. 청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유학생과 지식층에게 "이제 혁명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인식을 더욱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당시 청나라 국내와 해외에는 아주 많은 혁명조직-비밀결사-들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조직은 화흥회(華興會), 광복회(光復會), 흥중회(興中會) 등이 있었습니다. 화흥회는 후난(湖南)성 출신의 황흥(黃興), 송교인(宋敎仁) 등이 중심이었고, 광복회는 저장(浙江)성 출신의 채원배(蔡元培), 장병린(章炳麟) 등이 또 흥중회는 손문(孫文)등이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청나라 말기의 개혁 정치에 따라 일본에 유학하면서 하와이,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등지를 돌면서 화교와 유학생들 중심으로 혁명사상을 전파하고 거사 자금을 모으고 했습니다. 1905년 8월 이들은 도쿄에서 모여 통일된 조직-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을 결성하고, 11월에는 기관지 <민보(民報)>도 발행하게 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들은 중국 각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로 도쿄에 본부를 두고, 중국내에 4개 지부 -상하이, 충칭, 홍콩, 옌타이- 해외에 4개 지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브뤼셀, 싱가포르-를 두고 반청(反淸) 무장봉기를 준비합니다. 말이 지부 조직이지, 혁명에 동조하는 젊은이 몇 명이 고작인 지부가 태반이었습니다. 여기서 제시된 혁명의 목표, 혹은 지도 이념이 바로 손문이 구상한 삼민주의(三民主義)입니다. 삼민은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으로, '민족'은 민족주의적인 한족(漢族)국가를 세우는 것을 말하고, '민권'은 백성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말하고, '민생'은 백성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경제정책인데, 대표적인 정책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고르게 분배하는 정책을 의미했습니다. 혁명파는 이렇게 조직 등을 갖추었지만, 입헌파에 비해서는 훨씬 어려움을 겪습니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활동의 비밀이 유지돼야 하는데, 해외인 도쿄에서는 활동의 여지가 있지만, 중국 내에서는 교두보를 확보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혁명이란 물리력(物理力)이 필요한데, 자금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혁명파는 각지에 주둔해 있는 신군(新軍)을 포섭해 이들을 물리력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청나라 개혁정치에 의해 새로 조직된 군대 즉 신군 -新建陸軍-의 간부들도 일본에서 교육을 받는 도중 일본 내 혁명파 유학생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파들은 1905년 동맹회 결성이후 1911년까지의 수십 차례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모조리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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