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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일본의 정한론(征韓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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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2일(월) 15:17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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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청일전쟁 -일본의 정한론(征韓論)
이쯤해서 명치유신(1868)을 전후해서 일본에서 제기된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8세기 이후 일본의 국수적인 지식인들은 조선에 대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저자세와 조선통신사에 열광하는 일본 내의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일본 혼(魂)을 강조하는 '국학(國學)'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반발한 백제계 일본인들이 8세기 초에 편찬한 <일본서기(日本書記)>를 재평가하면서,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국학' 운동이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의 뿌리가 됩니다. 이들은 조선이 원래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서양이 지금 조선을 정복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이 동양평화에 이롭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이 강제 개항을 앞두고 존왕파(尊王派, 무능한 막부가 물러나고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자고 주장)와 막부파(幕府派)로 나뉘어 싸울 때인 1855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지금은 존왕파와 막부파가 싸울 때가 아니다. 빨리 국력을 길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과 만주를 침략해, 서양에 잃어버린 우리의 이익을 찾아야한다"라고 열변을 토합니다.
한참 뒤 제자 <기도 다카요시>는 "우리(존왕파)가 이기기는 했지만, 막부파의 불만이 걱정이다. 그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라고 정한론의 불씨를 이어 갑니다.(1867)
또 메이지 유신의 중심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도 "지금 온 세계 열강이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돼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빈 껍질만 남게 된다. 그러니 가까운 조선이라도 일단 확보해 두어야한다"고 거들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핵심 권력층에서는 조선 침략이 일본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조선 침략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1873). 강경파의 대표 <사이고 다카모리>는 "지금 무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빨리 조선을 침략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서둘렀지만, 온건파의 대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기다려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라면서 '조선을 침략하더라도 무사 계급이 아닌 근대화된 군인들과 하겠다'는 속셈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서양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온 <오쿠보>의 속셈은 '만약 무사들로 하여금 조선 침략을 하게 했다가, 승리라도 하면, 무사 계급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고,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이 논쟁에서 <메이지(明治)>천황은 온건파인 <오쿠보>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급진파 <사이고>는 정권에서 물러나고, <오쿠보>의 세상이 됐습니다. <오쿠보>는 '급하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경우, 러시아나 서양 열강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선은 조선을 개항시켜 경제적인 실리부터 얻고, 일본의 힘이 길러지면 그 때 식민지로 삼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오쿠보>의 계획대로 진행이 됐지요. 군함 운요호 사건(1875)이 그렇고, 조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도 그렇게 맺어지게 됐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조선 개항은 직접 나서지는 않아도 속으로 개항을 바라고 있던 미국과 영국 등의 묵시적인 지지 속에서 진행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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