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왜 사냐?
|
|
2017년 09월 28일(목) 16:45 [주간문경] 
|
|
|

| 
| | | ↑↑ 김 안 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문경대학교 석좌교수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원장 | ⓒ (주)문경사랑 | | 김상용(金尙鎔, 1902~1951) 시인이 1934년 2월호 ≪문학(文學)≫지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소’하는 제목의 시가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 갈이 /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라오 /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 / 건 웃지요.’
이 시인은 왜 사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면서 50세의 젊은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의지나 소망과는 관계없이 완전히 타의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서로가 모두 상이한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누구나 태어났으니까 다른 선택 없이 그냥 살아가게 된다.
사람에게 출생과 관련한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아마 모든 사람은 좋은 시대에 좋은 나라와 좋은 지역에서 좋은 부모를 통해 좋은 몸과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와 자연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에 대해 동일한 확률을 부여하였으며, 그리하여 인간들은 매우 다양한 요소와 여건을 갖고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각자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기의 삶을 창출해 나가게 된다.
왜 살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답변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산다는 극히 고상한 답변에서부터, 나와 가족을 위해 산다는 이기적 답변을 거쳐, 기왕에 태어났으니 그냥 그대로 살고 있다는 평범한 답변에까지 이른다.
왜 사냐에 대한 답변으로 가장 성스러운 것은 아마 ‘하느님이 창조해준 귀중한 생명이니만큼 잘 보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가장 서글프고 낙망스러운 것은 ‘죽지 못해 산다’일 것이다.
사람이 삶과 죽음을 자의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할 때, 죽음 쪽을 택하여 결행하는 것을 자살, 자결(自決), 자진(自盡)이라고 한다.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몸과 마음이 더 편하고 때로는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결단한 자살이지만 결코 권장할 만한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죽음 보다 더 괴로운 삶’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일단 살아가면서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길을 찾도록 노력함이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목적과 수단이 있다. 목적은 수단이 지향하는 바고 수단은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말이 있다. 사는 것이 목적이고 먹는 것이 수단이다. 그러나 그 역(逆)은 진(眞)이 아니다.
즉, ‘먹기 위해서 산다’는 말은 옳지 않다. 산다고 하는 목적을 올바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먹는다는 수단을 충실히 활용해야 한다. 산다는 목적은 높고 숭고할수록 좋고 먹는다는 수단은 다양하고 풍부할수록 좋다.
삶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수단은 먹는 것만이 아니라 수입과 재력, 지식과 학력, 직업과 경력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이들 수단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구비하여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지향하는 삶의 목적을 올바로 달성토록 해야 한다.
왜 사냐란 물음에 올바로 답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비교적 하기 쉽다. 앞의 물음은 삶의 존재이유 내지 목적에 관한 것으로 신과 자연의 섭리로부터 그 답변을 얻을 수 있는 반면에 뒤의 질문은 삶의 과정과 방법에 관한 것으로 다분히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답변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후자는 전자에 비해 답변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날 것이다. 왜 사냐란 물음에는 웃고 넘어갈 신성(神性)과 철학이 있지만 어떻게 사느냐란 질문에는 그냥 웃을 수만 없는 인성(人性)과 현실이 있다.
|
|
|
|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주간문경을 읽으면 문경이 보인다.” - Copyrights ⓒ주간문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간문경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주간문경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