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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손의 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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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28일(화) 16:45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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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김 안 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문경대학교 석좌교수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원장 | ⓒ (주)문경사랑 | | 왕조 시대에 있어 임금의 일가를 왕족(王族)이라 하고 임금의 후손(後孫)을 왕손이라 한다. 한 왕조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왕족과 후손들은 많은 희생과 핍박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왕조가 멸망한 순으로 남겨진 왕손들의 성씨를 살펴보기로 한다.
532년에 멸망한 가야(伽倻)의 왕손 김해김씨(金海金氏), 660년에 멸망한 백제(百濟)의 왕손 부여고씨(扶餘高氏), 668년에 망한 고구려(高句麗)의 왕손 부여고씨, 918년에 망한 태봉(泰封)의 왕손 경주김씨(慶州金氏), 926년에 멸망한 발해(渤海)의 왕손 대산대씨(大山大氏), 935년에 멸망한 신라(新羅)의 왕손 경주박씨(慶州朴氏)와 월성석씨(月城昔氏) 및 경주김씨, 936년에 망한 후백제(後百濟)의 왕손 황간진(견)씨(黃磵甄氏), 1392에 멸망한 고려(高麗)의 왕손 개성왕씨(開城王氏), 그리고 1910년에 멸망한 조선(朝鮮)의 왕손 전주이씨(全州李氏)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는 현재 왕족과 왕손이 매우 많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다.
나는 태어나 철이 들면서 내가 신라 왕손의 후예라는 말을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경주김씨 시조인 알지(閼智)의 66세손이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39세손이기 때문에 신라가 망하지 않고 천 년 더 지속하였더라면 지금 왕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높은 긍지를 느꼈고 동무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으며 신라가 망한 것을 무척 아까워하였다. “신라가 지금까지 존속하였더라면 너희들은 모두 나의 신하나 백성이 되어서 그렇게 마주 서 있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을꺼야!”하는 농담도 가끔 했다.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 같이 간 일행 중 한 사람이 일본 주최 측에 나를 신라 왕손이라고 소개했더니, 회의장에서 나를 그렇게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정중히 대해 주어서 좀 부끄러우면서도 언행을 더 조심했던 경험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족보와 선대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보학(譜學) 공부를 시작했다. 직계 장손이 되어야 왕이 되기 쉽고, 첩의 아들인 서자(庶子)로 태어나서는 왕위를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왕손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임금으로 간택되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 같았다. 신라 992년간의 임금은 모두 5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경주김씨는 38명이었고, 이 중 나의 직계선조는 6명이었다.
그들은 1세 시조로부터 보면 11세 지증왕(智證王), 17세 내물왕(奈勿王), 19세 원성왕(元聖王), 22세 신무왕(神武王), 23세 문성왕(文聖王), 28세 경순왕이다. 신라 시대 선조 가운데 서자는 없었지만 장자 아닌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
문제는 경순왕 때 일어났다. 그는 낙랑공주(樂浪公主)라는 후궁과의 사이에 은열(殷說)이란 아들을 두었는데, 이가 바로 나의 직계 선조가 된다. 신라가 건재했어도 왕위는 장자인 일(鎰), 곧 마의태자(麻衣太子)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내가 왕이 되는 길은 까맣게 멀어져 버렸다.
고려시대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는 첩의 소생인 서자의 신분으로는 벼슬길에 나가기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시대에 후처나 첩의 아들로 태어난 선조가 여러 분 계셨으니, 그 때 내가 태어났더라면 왕위는 고사하고 아무 벼슬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신분상의 제약이 없는 만인 평등의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참으로 원통하고 애달픈 사람은 나같이 희미한 변두리의 왕손이 아니라 멸망 당시 다음 임금으로 확정된 세자들이였지 않았나한다. 한 발짝 못미처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 이들의 신세와 심경이 가슴에 와 닿는다.
신라의 천년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신라 망한지 천년도 수유(須臾)로다. 봄풀은 해마다 다시 푸르게 되는데 왕손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춘초연년록 왕손귀불귀(春草年年綠王孫歸不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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