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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세종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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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05일(월) 09:06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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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김 안 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원장 | ⓒ (주)문경사랑 | | 국방, 과학, 학문, 국악,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의 치적은 그만두고도 ‘한글’하나 만으로도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와 세계 문화사에 기리 빛날 위대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우리의 글을 창제하여 보급하기까지는 크게 세 개의 어려운 고비를 넘었다.
그 첫째의 어려움은 문자의 창제였다. 세종은 1397년 조선조 세 번째 임금인 태종(太宗)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휘를 도(祹)라 하고 군호는 충녕(忠寧)이라 하였으며, 후일 장헌(莊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천부적인 영특함과 지혜로움을 갖고 있었고, 또한 두 형님의 양보로 왕위에 오른 데 대한 송구함과 의무감으로 훌륭한 임금이 되어 큰 치적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내가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백성들이 쉽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야겠다는 그 발상의 시작이다. 조선 사람의 언어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그 발상만으로도 세종은 위대한 대왕이다.
1419년에 22세의 나이로 제 4대 왕이 되고, 그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을 창설하여 많은 학자들을 모아 학문연구의 요람으로 삼았다. 동남아와 중동 및 유럽은 물론 오랑캐의 문자들까지 모아 우리나라 말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려는 연구를 시작했다.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같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세종 25년 1443년에 본격적인 창제에 착수하였다. 중국의 한자나 이집트의 상형문자(象形文字)는 표의문자(表意文字), 곧 뜻글자로 되어 있어 수많은 글자를 다 외워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표음문자(表音文字), 곧 소리글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집현전에서 늦게까지 연구하다가 그대로 잠이 든 신숙주의 몸에 어의(御衣)를 벗어 걸쳐준 이야기 등 여러 일화를 남기고, 밤마다 늦게까지 함께 연구한 세종의 눈이 약화되어 잘 보이지 않게 되는 지경에 가서야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완성되었다. 모두 28자의 모음과 자음으로 된 훈민정음은 드디어 세종 28년 1446년 음력 9월 상한(上澣), 양력 10월 9일에 공포되었던 것이다.
창제 다음으로 닥친 고난은 국내 선비들의 반대였다. 훈민정음 공포와 함께 바로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 및 편찬에 힘쓰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같은 작품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으로 있던 자명(子明) 최만리(崔萬理) 등은 제작 과정에서부터 우리 고유의 문자 제정에 반대 입장을 취해 왔으며, 창제 중인 1444년 2월 20일에는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대대적인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자 위주의 사대주의에 입각한 반대 선비들을 설득하고 회유하며 협박하기도 하면서 그 보급을 강행했던 것이다.
한글 창제에 따른 세 번째이자 가장 어려웠던 난관은 중국의 반대였다. 천문학과 책력과 문자는 중국 것만을 써야한다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따라 당시 명(明)나라 황제 영종(英宗, 재위 1435~1449)과 그 조정은 소국(小國)인 조선의 새 문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크게 번민하고 있는 왕을 위해 왕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명의 황후(皇后)에게 왕이 백성을 위해 시력을 잃으면서까지 만든 새 문자의 사용을 허락해달라는 간곡한 청원을 올렸고, 황후는 이를 황제에게 전하여, 드디어 허락을 하게 되었다. 황제가 말한 승인의 변이다. “만 백성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기의 눈을 희생물로 바친 성군의 업적이로다.”
소헌왕후는 1446년 3월 24일에 51세로 서거하고 7개월 뒤인 10월 9일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으며, 4년 뒤인 1450년 2월 17일에는 대왕께서 53세로 붕어하셨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탄생한 훈민정음은 자음(子音) 14자, 모음(母音) 10자로 발전하고 널리 보급되었으며, 1927년 7월에 언문이란 이름에서 ‘한글’로 바뀌었다. 1928년 10월에 ‘한글날’이 제정되었고, 해방 후에는 국보 2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1일자로 UNESCO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팔천만 우리 민족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높이 앉은 세종대왕 동상을 바라보고 여주(驪州)에 두 분이 안장되어있는 영릉(英陵)을 참배하면서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한글을 유용하게 읽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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