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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볕들

2015년 04월 10일(금) 16:44 [주간문경]

 

 

↑↑ 정창식
아름다운선물101
대구지검 상주지청

ⓒ (주)문경사랑

 

4월이다. 4월의 봄은 꽃으로 시작한다. 맨 가지에서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아마도 긴 겨울 무채색에 지친 사람들의 재촉과 성화에 못이긴 나무의 여린 마음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새재는 아직 겨울과 이별을 남겨놓고 있다. 하지만 곧 봄을 어쩌지 못할 태세다.

4월의 새재는 붉은 진달래에서 절정을 이룬다. 진달래는 조령천 산비탈에 점점이 붉게 핀다. 다른 꽃과 같이 있든 저 혼자 숨어 피든지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진달래다. 그때 사람들은 감탄을 한다. 화사한 듯 하면서도 새재의 진달래에게서는 향수 같은 생래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새재의 진달래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임진년(1592년), 수만 명의 왜군들은 ‘새도 넘기 힘들어 쉬어간다’는 옛 새재 길을 넘어갔다. 그게 4월이었다. 한양과 부산을 잇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간선대로 이 옛길을 왜군들은 꽃놀이 하듯 유유히 지나갔다.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꾸며 터벅터벅 걷던 저 희망의 과거 길을, 신임 경상도 관찰사가 경세치민의 마음을 품고 위세 좋게 내려오던 저 길을 왜군들은 점령군의 기세로 올라갔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한 성재 고상증(1550~1627)이라는 이가 있다.

그가 지은 ‘용사실기’에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적군이 산이며 숲과 들판에 그득하여 사람들이 몸을 숨길 곳이 없었으며, 적의 세력은 더욱 성해졌다.”

그리고, 왜적들의 만행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이 오늘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고 통탄하였다.

새재의 진달래는 봄바람에 연붉은 잎술을 얇게 떨면서 그들의 만행을 숨죽여 보았다. 아니 새재만이 아니었다. 산북 석문의 바위에 핀 진달래도, 월방산 산모퉁이에 핀 진달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부터 진달래는 스스로 연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연붉은 새재의 진달래는 마치 공간에 떠 있는 모빌처럼 지금도 애잔해 보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슬픈 4월의 기억을 지닌 새재를 시인 신경림은 오늘 날 다시 눈물짓게 하였다. 그는 ‘새재’라는 장시에서, 이곳을 배경으로 항일의병활동을 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 진 ‘돌배’라는 청년의 삶을 애잔하게 노래했다.

‘문경새재 넘어가면/새 세상이 있다는데…./문경새재 서른 굽이/먼저 넘은 벗 따라가세.’

돌배는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지만, 일본의 억압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새 세상이 있다는’ 새재로 와서 풍기, 영해, 문경 등지를 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가 꾸었던 꿈은 사소하였다.

‘열두 길 바위굴 지나야/햇볕 한 조각 보여,/그래서 가난한 사람/활갯짓하고 모여 사는/새 세상이 있다더라, 여우볕들 있다더라.’

새재 어딘가에 있다던 이상향인 여우볕들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끼리 땅 일구고 씨 뿌려 거두어서, 밤에는 모여 앉아 옛 얘기할 수 있는 그때를 고대했던 것이다. 새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의 공간, 이상향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비록 새재의 진달래가 임진왜란의 참혹함을 숨죽여 보았다지만, 사람들은 새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새재를 버리고 패한 신립장군을 원망하며, 병자호란의 최명길을 새재 성황신의 도움을 받는 이야기를 만든 것도 결국 문경새재가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줄 거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이 신경림이 ‘문경새재 넘어가면 새 세상이 있다’고 새재를 정의한 힘과 바탕인 것이다.

4월, 봄의 새재는 곧 붉은 진달래로 덮일 것이다. 그 봄날 어름에, 신경림 시인이 새재 어딘가에 있다던 ‘햇볕 한조각 보이는 새 세상, 여우볕들’을 찾아 나설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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