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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 주암(舟巖)에서 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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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3월 28일(금) 17:16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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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정창식
갤러리 - 아름다운선물101
법무사 | ⓒ (주)문경사랑 | | 우리 문경문화의 특징은 문화적으로 자유로우면서 창의적인 면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두터운 포용심을 지니며, 생활방식 면에서는 현실을 벗어나 삶을 즐기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 문경이 변방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문경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지 또는 인접지였다. 그래서 전쟁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령이라는 험준한 준령(峻嶺)은 중요한 교통로이면서 폐쇄적 관문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형성된 행정체계에서 지금의 문경시는 대부분 인근의 상주와 예천에 속해왔다. 그래서 지금 우리 문경의 읍면이라고 할 수 있는 영순면과 가은면 그리고 산양면 등은 상주에, 동로면과 산북면 등은 예천이었다. 이들 지역은 상주와 예천의 인접지로써 중심부에서 보면 변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이 지역에 대한 행정적 지원과 문화적 영향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이 있다. 16세기 우리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서당은 영빈(穎濱)서당이다. 당시 상주목사였던 신잠이 상주목에 세운 열여덟 군데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영빈서당의 전신이 되는 서당이 있었다. 영빈서당 이설기(移設記)에 전해지고 있다.
“중종39년 1544년 상주목사 신잠이 각 현에 서당을 창건하고, 이 서당(영빈)은 그 중의 하나이다. 산양 현사의 건너편 웅암의 산기슭 아래 바로 영원사 옛터에 자리를 잡았었다. 그러므로 석탑 3좌가 아직도 높이 우뚝 서있다. 네 칸의 집을 세워 당(堂)과 마루와 실(室)로 나누고 그 이름을 ‘죽림’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웅암의 산기슭 아래 영원사 옛터에 자리 잡은 ‘죽림’이라는 영빈서당의 전신이 되는 서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바로 지금의 주암정이 있는 뒷산, 도천사지 삼층석탑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 세 기가 세워져 있었다.
이 또한, 우리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탑의 형상이다. 일반적으로 금당(金堂) 앞에는 한 기 또는 두 기의 탑이 세워지는 것이 상례이나 탑 세 기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죽림서당은 산양현 유림들의 향약공간이었던 수계소(修禊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수계소는 지역이 구석에 있고 관청과 멀리 떨어져 그 정화(政化)가 미치지 못할 때 지역유림이 자체적으로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유교의 덕과 학이 오롯이 존재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살펴보면, 금천(錦川)에 위치한 주암은 산양현과 서중의 근암서원 등과 함께 지역 유학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마치, 수계소가 중심부의 관청 역할을 대신 한 것처럼 말이다. 더하여, 불교가 성했던 통일신라 시대에는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탑 문화의 양식을 펼쳐 지역 불교 문화를 선도했다. 최근 가까운 곳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굽는 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주암은 석문구곡과 산양구곡 등 구곡의 한 구비(曲)로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려 정자를 얹은 것은 어쩌면 오늘의 우리에게 문경문화의 면모를 다시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변방에서 찾은 문경문화, 주암에서 빛나다’ 라는 명제는 당연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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