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여수동좌(與誰同坐)
|
|
2025년 09월 30일(화) 17:05 [주간문경] 
|
|
|

| 
| | | ↑↑ 정창식
문경문화원 부원장
갤러리 문경공간-아름다운선물101 대표
법무사 | ⓒ 주간문경 | | 지난 2021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소에서 발간한 ‘문경의 집성촌’에 의하면 우리문경의 마을 216곳 중 132개 마을이 집성촌으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영순면 금포마을의 진주 강씨, 영순면 왕태마을의 개성 고씨, 흥덕동 깃골의 상산 김씨, 산양면 미르물의 초계 변씨, 현리마을의 인천 채씨 등이 그 대표적으로 60개 성씨에 이른다고 한다.
살펴보면, 한 마을이 같은 성씨의 일가들이 다수를 점유하는 집성촌으로 불러지기 위해서는 수 대에 걸친 세월이 필요하다. 자료에 의하면 조선 초기까지 가족관계는 느슨한 형태, 즉 일가와 외가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권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을 겪으면서 가장의 권한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형태로 변화되면서 집성촌의 형태가 늘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입향조가 마을에 터를 잡은 시기가 그 무렵 이후가 적지 않다고 한다.
공(公)이 입향한 것은 1425년 6월이다. 1424년 세종 임금 당시 충청도 결성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뒤 관직을 버리고 포내(浦內) 마을로 이거하였다.
포내는 옛 포구가 있는 안쪽 마을을 일컫는데 한글 이름인 개안으로도 불리었다. 그렇다면, 교통의 도구가 배가 됨으로써 마을의 시작은 들과 산이 아니라 강이 된다. 그 강은 태백 황지에서 시작되어 안동의 반변천을 지나 예천의 내성천과 합류한 뒤 삼강(三江)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우망마을이다.
공(公)은 강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 그루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삼수정(三樹亭)이라 했다. 그리고 호를 삼수(三樹)로 삼았다. 자손을 키워 교육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하는 삶을 이어갔다.
오래만에 고향마을을 찾았다. 고향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방문이 뜸해졌고 큰집 어른들의 작고로 비게 된 큰집은 아예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은 다시 이렇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삼수정을 찾았다. 종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멀리에서 보였다. 관광버스와 개인차량들이 도로 갓길을 차지하였다. 어렵게 주차를 한 뒤 삼수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래정씨 12世 三樹(龜齡)公 입향 600주년 기념 告由祭”
여기까지 오는 곳곳에 이렇게 적힌 현수막이 여럿 걸려있었다. 그랬다. 공(公)께서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지가 올해 600년이 되는 것이다. 입향 이후 공(公)의 음덕으로 직계후손만 13명의 재상과 2명의 대제학, 2명의 배향공신 그리고 136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비록, 생각이 천려(淺慮)하고 소양이 얕아 밖으로 드러낼 처지가 아무것도 없는 불민한 사람이지만 소식을 알고도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을비가 오락가락하였으나 선조의 입향 6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경향각지에서 수많은 문중들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그것은 선조에 대한 감사와 그 뜻을 기리는 마음이 서로 같기 때문일 것이다.
삼수정에서는 종손과 기관단체장들이 참여하는 고유제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있었던 곳에는 선물과 담소, 음식을 나누는 접빈례가 진행되었다. 그 접빈례의 하나로 서예가 한 분이 붓글씨를 직접 써주는 행사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어떤 글씨를 원하는지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법정스님의 ‘오두막편지’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스님의 글은 이렇게 쓰여있었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함께 할 것인가. … 자리를 같이 하는 상대가 그의 분신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문득, 오늘은 입향조인 할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수동좌(與誰同坐)’ 네 글자를 부탁했다. 나무 세 그루가 가을 하늘을 향해 힘차게 서 있었다.
|
|
|
|
주간문경 기자 “주간문경을 읽으면 문경이 보인다.” - Copyrights ⓒ주간문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간문경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주간문경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