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겪은 6.25
|
2015년 06월 30일(화) 16:54 [(주)문경사랑] 
|
|

| 
| | | ↑↑ 김 안 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원장 | ⓒ (주)문경사랑 | | 6.25동란 3년은 나에게 있어 13세에서 16세까지의 나이와 호서남 초등학교 5학년말에서 문경중학교 3학년 1학기말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아무런 준비도 없는 한국을 향해 38도선을 넘어 남침할 때의 나는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남면 흥덕 4리 깃골의 초가집에서 54세의 아버지와 52세의 어머니, 17세의 누님과 10세의 남동생 등 모두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 동란에서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젊은 청장년이 없었는데 기인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 발발 다음날,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교장선생님께서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국군이 해주(海州)를 탈환하며 북진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학업에 열중하라는 훈시를 하셨다. 그러나 27일에 정부는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미군의 참전이 시작되었으며, 28일에는 인민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었다.
이 무렵부터 보도연맹 가입자를 위시한 좌익계로 분류된 국민의 상당수가 처형되었으며, 좌우익의 구분이 더욱 명료화되기 시작했다. 7월 3일에 한강을 넘은 인민군은 13일에 청주(淸州)를 점령하였고 이어 이화령(梨花嶺)을 넘어 문경으로 진격했다. 인민군 1사단과 13사단 및 15사단 상대로 국군 6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25일간 버티다가 역부족으로 28일에 영강(穎江)방어선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 기간에 대구로 이전했던 정부는 8월 18일 다시 부산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문경 전투 중인 7월 27일에 동리 이웃들과 같이 남부여대하여 피난길에 나섰다. 첫날 영순면(永順面)의 새갗이란 마을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낙동강 쪽으로 내려가는 데, 이미 인민군이 앞에 가면서, “동무들! 집으로 돌아가라우!”하기에 모두 다시 집으로 되돌아 왔다. 이로부터 적치하 2개월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에 소집되어 나가서 선생님들과 같이 인민군의 지휘를 받아 북한의 애국가와 ‘김일성장군의 노래’등을 배워 부르고, 인민군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많이 써서 보냈다. 나는 반장이어서 더 열심히 했다. 한 편 우리 마을에는 이소좌(李少佐)라는 장교가 매일 나와 주민들에게 사상교육을 시켰는데, 나를 특별히 아껴주었다. 나의 학교 성적표와 상장 등을 보고서 나의 부모님께, “예는 특별히 수재니까 전쟁이 끝나면 내가 평양으로 다리고 가서 국비로 공부를 시켜 김일성대학까지 졸업하게 하겠으니 허락해 주시오”하는 것이었다.
중학교도 진학하기 어려운 형편이라 부모님은 허락하였고 나도 좀 불안하기는 해도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기에 무척 좋았다. 9월 10일경 이소좌는 기다리고 있으라 하고는 낙동강전선으로 떠났다. 9월 25일 추석 무렵 인민군 패잔병이 북으로 달려가고 곧 이어 국군이 들어왔다. 그러나 눈이 빠지게 고대하던 이소좌는 오지 않았다. 아마 9월 15일경의 낙동강 최후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나 한다.
10월 초 학교에 나가 6학년 1학기를 시작하고 부반장이 되었다. 다시 한국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국군아저씨들께 빨리 김일성 도당을 압록강 북쪽으로 몰아내라는 위문편지를 줄기차게 썼다. 이와 같이 양쪽의 노래와 편지로 바쁜 1950년을 보내고 이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국가고시를 거쳐 문경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2년여의 밀고 당기는 전쟁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에 들어갔으니, 6.25발발 후 1,129일만이었다. 그 때 나는 중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친 방학 중에 있었다.
먼 훗날 1968년 11월 2일의 동해안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때 그들에게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는 말을 하여 입이 찢기고 가족이 몰살당한 초등학교 2학년의 아홉 살 난 이승복(李承福)군의 소식을 듣고서는 6.25때 내가 했던 처신과 비교하여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몇해 전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대학을 둘러보면서, 이소좌의 얼굴과 함께 나의 모교가 될 뻔 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인간운명의 무상함을 절감하기도 하였다.
|
|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주간문경을 읽으면 문경이 보인다.” - Copyrights ⓒ(주)문경사랑.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주)문경사랑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주)문경사랑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