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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본 광해군의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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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02일 [주간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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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엄용대
엄용대 한의원 원장<054-553-3337> | ⓒ (주)문경사랑 | | 조선시대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은 오랜 전란과 왕위계승 암투 속에서 몸과 정신은 날로 쇠약해갔지만 그는 스스로 체력 회복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실록은 이런 광해군을 냉소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군주로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모범을 보이는 대신, 여색에 집착하고 유교사회에선 음사(淫事)인 무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실록은 비방(秘方)이란 말로 여색을 탐닉한 광해군을 비난했으며, 환관 이봉정의 입을 빌려 왕의 여성편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경연을 오랫동안 폐하고 일반 공사도 태만해서 매양 결제의 날을 넘겼다. 더러 밤에 들이려 하면 왕이 항상 침내(寢內)에 있었기 때문에 환관들도 뵈올 수가 없었다.’ ‘왕이 여색과 놀기를 좋아해 매양 총희(寵姬) 서너명을 데리고 후원을 노닐었다.’등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광해군은 각종 약재와 섭생으로 몸을 돌보는 대신 무속에 집착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무속인을 동원한 질병 치료를 유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으며, 무속인이 유학의 성지인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불허 했습니다.
근대 이전의 질병 치료는 병의 원인과 본질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결정됐습니다. 질병을 신의 처벌로 여기면 죄를 회개해야 했고, 귀신이 들어 병이 생겼다고 보면 귀신을 쫓아야 했습니다.
비문명 세계에선 무속인이 곧 의사였습니다. 광해군때 총애를 받은 무속인 ‘복동’의 기록은 광해군의 질병관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복동’이 저주를 한 것 때문에 국문을 당하였는데,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를 하기에 이르러 오히려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 왕이 그에게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상을 내리니 한 달 남짓 만에 권세가 조야를 흔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와 이 사건을 배경으로 벌어진 ‘살인사건’ 에도 무속과 저주가 난무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실록에 기록된 사건에서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온갖 주술이 총동원된 전대미문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만큼은 사실로 보입니다.
질병관(觀)은 어떤 의학체계에서든 치료에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조선의 의료체계에서 유학과 무속은 나름의 치유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유학은 구체적인 몸의 치유 문제를 마음과 결합시키고 경건하게 마음을 닦는 수양론에 집중했습니다.
무속은 인간의 감정을 의례를 통해 안심시키면서 감정을 달래주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전자가 요즘말로 ‘힐링’이라면 후자는 위약(僞藥)효과, 즉 플라시보효과에 비유됩니다.
이런 여러 맥락에서 보면 광해군의 질병관이 무속에 경도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형제간의 왕위쟁탈전과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겪은 심신의 피로와 고통은 의약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가해진 엄청난 심적 부담을 힐링과 마인드컨롤로 극복하려고 발버둥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후 6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는 불안증과 그릇된 질병관은 그의 심신을 괴롭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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