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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충만

2020년 06월 30일 [(주)문경사랑]

 

 

↑↑ 정창식
아름다운선물101
문경문화원 이사

ⓒ (주)문경사랑

 

반재이 도랑가를 지나다가 나리꽃을 보았다.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한여름, 산에서 자주 만나는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리꽃을 보면 여름임을 안다. 얼마 전, 하지(夏至)도 지났었다. 그러고 보면 이래저래 여름이 깊숙이 들어왔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운 날씨로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는 요즘이다.

“올해는 에어콘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요?”

여태까지 에어콘 없는 여름나기를 고집(?)해온 나에게 안해는 항의하듯 말했다. 정말이다. 우리 집에는 에어콘이 없다. 여름에는 선풍기와 손부채가 유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의 자연 에어콘인 바람을 믿고 있었다.

나무들이 있는 마당 딸린 이층 단독주택에서, 저 멀리 돈달산과 영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한 에어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더위에 지치더라도, 거실 창문과 부엌 뒷문을 활짝 열면 바깥바람이 집안을 순환하여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바람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은 2년 전 무더위였다. 덥고 갑갑한 공기는 선풍기와 손부채로는 어림도 없었다. 심지어 믿었던 바람까지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집에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바깥이 좋았다. 그래서, 휴일이면 야외로 나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안해는 되살리듯 묻고 있었다.

결국 에어콘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에어콘이 들어오기로 한 전날에 에어콘이 놓일 자리를 정리하면서 한쪽 벽면을 모두 비웠다. 액자와 전축, 여러 가지 물건들을 치웠다. 그러자, 텅 비워진 황토색 벽지 한 면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무심히 보았을 뿐인데, 아무 것도 없이 비워진 벽면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 가슴속을 차지하는 듯했다. 예기치 않은 편안함이었다. 늘 벽의 전축과 액자들은 자리를 차지한 채 또 무엇을 채울까 생각하도록 했었는데, 비워져 있는 벽은 그 것만으로도 온전한 자체, 더 이상 채울 것이 없는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법정스님이 지은 ‘텅 빈 충만’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글에서 스님은 큰절에 있는 한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자주 찾곤 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방 주인의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과 아무 장식도 없는 빈 벽과 텅 빈 방이 좋아서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 방의 정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는데, 잠시 옮겨본다.

“그 방에는 달력도 없고 휴지통도 없으며, 책상도 없이 한 장의 방석이 화로 곁에 놓여 있을 뿐이다.” 다만, “방 한쪽 구석에는 항시 화병에 한두 송이의 꽃이 조촐하게 꽂혀 있고, 꽃이 없을 때는 까치밥 같은 빨간 나무 열매가 까맣게 칠한 받침대 위에 놓여 있곤 했었다”고 하였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텅 빈 벽은, 아마도 법정스님의 글에서 설명한 ‘아무 장식도 없는 빈 벽과 텅 빈 방’과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저 벽이 있는 우리 집 거실은 스님의 방처럼 온전히 비워 있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거실 다른 벽면들에는 책들과 차를 마시기 위해 마련한 차판과 화분들로 어지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거실에 혼자 앉아 비워진 저 한쪽 벽면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의 것들이 무언가 넉넉해지는 느낌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충만함과도 닿아 있다. 스님은 글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빈 방에서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분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하다.”

그러나, 우리들 삶은 저 ‘텅 빈 충만’을 오래 소유하기에 너무 멀리 와있다. 내일 저 벽면은 에어콘으로 한 쪽이 채워지고, 한 쪽은 액자와 전축이 다시 자리를 차지해 있을 터이다.

대문가 당단풍나무가 이미 잎이 무성하여 가지를 높이 뻗은 채 서 있다. 그곳 어느 가지에서 매미가 앉아 한창 울고 있다. 맞은 편 담 밑에는 방금 핀 나리꽃이 볕을 받아 졸고 있는 여름이다.


010-9525-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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