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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토분쟁(68): 아시아의 영토분쟁-독도(19):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

2018년 12월 11일 [(주)문경사랑]

 

 

↑↑ 강성주
재경문경시향우회장
전 포항문화방송 사장

ⓒ (주)문경사랑

 

우리가 처음에 살펴봤듯이 서양(유럽) 세력들은 1492년부터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하고, 곧 이어 아프리카를 남쪽으로 돌아서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일본 등 동양으로 넘어왔다.

우리가 책에서 배운 <하멜표류기>도 이 무렵의 기록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며 주식회사로서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두고,1602년 설립됐다) 소속 선원 겸 사무원인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1653년 무역선인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뒤 억류당했다가 1668년 귀국하기 까지 15년간 겪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인데, 이것은 밀린 임금을 받기위한 일종의 ‘출장복명서’ 혹은 ‘산업재해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일본과는 꾸준하게 교류하며 무역을 계속했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이 비교적 늦게 개항했는데도 빨리 근대화의 길을 밟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저력이 바로 이러한 교류에 있다고 말한다. 일본이 네덜란드 등 유럽과 관계를 꾸준하게 유지하면서 앞선 유럽의 문물을 배우고 축적한데서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일본에 카톨릭을 전파하려고 시도한데 비해,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는 전도와 거리를 두고 무역에만 열중해, 안심하고 네덜란드와 교류를 계속한 것이다.

세계사에서 이 시기를 ‘지리상의 발견’ 또는 ‘대항해 시대’, ‘탐험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말의 저의는 서양[유럽] 국가들이 그 동안 항해술의 부족 등으로 가까운 곳만 다니다가 동양,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양주, 나아가서는 남극, 북극 등을 발견해서 자기들의 영토로 삼았다는 이야기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땅들을 놓고 자기들끼리 뺏고 뺏기는 전쟁을 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서양의 역사를 배우면서 ‘탐험가’라는 말을 배웠는데, 이런 사람들이 탐험[항해]해서 발견한 땅은 대개 그 탐험가의 소속 국가 땅으로 되는 것을 책에서 읽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일본이 뒤늦게 이 길로 나선 것이다. 일본은 독도도 주인이 없는 땅이어서 일본 땅이 됐다고 말한다. 이 말이 맞는가? 한번 살펴보자.

조선 고종(高宗)은 1895년 일본 군인과 폭력배들로 구성된 낭인들의 난입으로 명성황후를 비명에 잃고 나서[을미사변, 乙未事變, 1895.10], 러시아 공사관으로 정치적 망명[俄館播遷, 1896.2~1897.2]을 단행한다. 자신의 생명과 국가[조선왕조]의 자주성이 극도로 위협받던 상황이었다.

국왕의 망명 기간이 길어지자 당시 국민들은 독립협회 등을 통해 고종이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제국) 공사관에서 궁(宮)으로 돌아올 것을 소리 높게 요구했고 또 조선의 자주 독립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조선의 자주 의지를 널리 알리고 또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다(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제국 선포 후 여러 가지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행정력 강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앞에서 살펴봤지만, 고종은 1882년 감찰사 이규원을 울릉도로 파견해 “잘 살피고 오도록 한다”.

조선 태종 때부터 실시된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비워둔 울릉도에 우리나라 사람 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거주한다는 보고를 받고난 뒤의 일이다. 이규원의 감찰이 끝난 뒤 고종은 1899년 내부(內部) 관리 우용정(禹用鼎)을 시찰관(視察官)으로 다시 파견해 울릉도 상황을 살피게 한다.

뒤의 역사가 기록하듯이 당시 서구 열강들은 남의 영토를 뺏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닐 때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서 목재를 벌채하고 독도에서는 강치를 막 잡아 가는 등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일본인들의 철수를 요구했다. 동시에 대한제국은 울릉도에 대한 행정력을 증대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용정의 시찰이 끝난 뒤 대한제국은 1900년(光武 4년) 10월 24일 의정부(議政府, 일본의 태정관처럼 한국의 의정부는 당시 최고의 행정기관이었다) 회의에서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기로 결정했고, 이튿날인 1900년 10월 25일 고종 황제의 재가를 받아, 10월 27일 <칙령 제41호>로 관보에 게재했다.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제 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할 일
제 2조: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石島, 독도]를 관할할 일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는 이 2개 조항을 포함해 모두 6개조로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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